영화 ‘모두 다 잘될 거야’

2024년 10월 15일

& 혼인신고 비하인드 스토리

지난 8월, 서울의 한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그날은 남자친구와 내가 연인이 된 지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구청 민원실의 풍경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그곳에 꽃다발을 든 두 명의 남자와, 증인으로 함께 해줄 여자 두 명이 나타나자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미리 연습한 대로 혼인신고서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다. 혼인신고서의 구분 칸이 남편과 아내로 구별돼 있어서, 동성인 우리는 각각 두 장을 작성했다.

몇 분 뒤, 번호표의 숫자가 바뀌고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남자 두 사람이 함께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자 담당 공무원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 처리를 시작했다. 신고서에 기입한 내용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렇게 10여 분 만에 혼인신고 접수가 마무리됐다.

공무원은 “동성 간의 혼인신고이기 때문에 접수와 동시에 불수리 처리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불수리 통지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확인하세요”라며 접수증과 불수리 통지서를 건네줬다. 그리곤 “결혼 축하드려요”라고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들었을 때, 뒤돌아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인정받는 느낌이란 이런 거구나.’ 법은 우리를 거절했지만, 사람은 우리는 거절하지 않은 것 기분이 들었다.

민원창구 뒤에는 신혼부부가 혼인신고를 기념할 수 있도록 마련된 포토존이 있었다. 진한 핑크색 꽃들로 장식된 하트 모양이 마치 관광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결혼 축하한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나가던 다른 직원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분은 흔쾌히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며 “구청 인스타그램 계정을 태그해서 올려주세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법은 변화하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때가 되면 하는 것’이라고 듣고 자랐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법 앞에서 언젠가부터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꼈다. 우리는 함께 가족처럼 살면서도 서류상에 남으로 남아야 했다. 같이 살 집을 구할 때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거나, 재산 문제를 상의하려고 해도 우리는 가족이 아닌, 타인에 불과했다.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우리는 실제로 꾸리는 삶의 모습에서 절반으로만 비칠 뿐이었다. 성숙해진 우리 관계만큼이나 그에 걸맞은 의무와 권리를 누리려면 결혼이라는 약속과 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40년 넘게 함께한 부부에게 벌어진 일

영화 <모두 다 잘될 거야> 스틸컷

이 고민을 담은 영화가 있다. 동성결혼이 불가능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그려냈다. 영화 <모두 다 잘될 거야>(원제: 從今以後, All Shall will be well)는 4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레즈비언 부부 중 한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에 벌어진 일을 그린다.

홍콩에 사는 60대 중반의 부유한 레즈비언 커플 ‘팻’과 ‘앤지’는 서로를 돌보며 살아간다. 두 사람은 친척은 물론, 가까운 친구들에게 모두 커밍아웃도 마쳤다. 명절도 함께 보내며 친척들 역시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웃의 성소수자 친구들과 교류하며 노후 준비도 착실히 하고 있다. 홍콩은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아서 법적인 부부가 아닐 뿐, 겉보기엔 화목한 ‘가족’과 다름없다.

그러던 어느 날, 팻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친척과 앤지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장례 방식에서 갈등이 생긴다. 친척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팻의 유해를 납골당에 모시고 싶어 했지만, 앤지는 팻이 생전에 바다에 잠들기를 원했다고 맞서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법적 부부가 아니기에 앤지에게 장례를 통제할 권리가 없어 장례식에서도 친척의 뒷자리로 물러나야만 했다. 납골당의 직원이 고인과 앤지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도, 친척으로부터 ‘가장 친한 친구’라고 지칭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팻의 명의로 돼 있던 아파트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 결혼을 앞둔 조카에게 새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홍콩의 집값은 비싸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친척들은 고인이 떠나 혼자 남겨진 아파트를 자신들에게 양보하기를 기대한다.

앤지로선 평생을 함께 살아온 집을 쉽게 양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집 역시 팻의 명의로 된 유산으로, 앤지에게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친척들과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진다. 아무리 사실혼 관계의 부부여도 법적인 인정이 없다면 혈연중심주의 제도에서 일방적으로 소외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재산을 놓고 싸우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 같이 몸싸움, 큰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성소수자로서 겪게 되는 가족 안에서의 소외와 차별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엮어낸다. 또한 섬세한 각본을 통해 오늘날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홍콩의 현실과 부동산 문제, 노후, 경제 불안정 등 사회 시스템을 드러낸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 성소수자들의 마주한 불합리한 현실을 반영한 전개는 공감대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영화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두 노년 남성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 <아저씨 X 아저씨>(원제: Suk Suk)(2019)을 연출한 레이 영 감독의 신작으로, 2024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 초청, 최우수 장편 퀴어영화 작품상인 ‘테디상’을 수상했다. 오는 11월 8일 개막하는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돼 상영을 앞두고 있다.

나는 2024년 10월 10일, 혼인평등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로부터 받은 혼인신고 ‘불수리 통지서’에 적힌 사유를 거부하며, 성별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을 꾸린 ‘부부’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다. 이 소송엔 우리를 포함한 결혼을 반려 당한 열한 쌍의 커플이 원고로 참여한다. (관련기사: 평등 소송 나선 동성 부부 11쌍 “동성혼, 시급히 먹고 사는 문제”)

아시아 국가 중에서 대만과 태국 등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을 비롯한 일본, 홍콩에선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은 혼인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서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일어나고 있다. 미래를 고치기 위해 원고로서 할 수 있는 건, 거절당할 용기로 혼인신고한 마음이 더 큰 변화를 이끌어 내길 바라는 일이다. 이 긴 여정을 앞두고 ‘모두 다 잘될 거야’라는 마음을 담아, 국가의 지연된 응답을 두 손 모아 기다린다.

[정규환의 다르게 보기]

오마이뉴스에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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