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리는 연습》

친구사이 소식지 기획전

저는 친구사이 소식지 팀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한 전시의 인터뷰이로 참여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체 인터뷰 내용은 소책자로 제작되어서 프로그램의 일부로 전시되었습니다. 10여 년 전의 이야기라 어느덧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오늘날 친구사이라는 단체의 소식지가 30년을 맞는 시점에서 한국 게이 매체의 역사와 흐름, 그리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흘리는 연습’이라는 제목처럼 그저 열심히 나의 이야기를 지금처럼 흘려왔을 뿐인데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가 되고, 내가 기록해온 것들이 결국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신기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보다 창의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재가공해 준 기획자들의 감각에도 매료되었습니다.

〈기록 너머의 연대〉(남선미 진행) 인터뷰 중에서

“규환 님, 안녕하세요! 웹진 운영, 팟캐스트 진행, 오마이뉴스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퀴어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전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오신 덕분에 글 을 늘 반가운 마음으로 읽고 있어요. 기록하고 전하는 데 규환 님만의 기준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프리랜서 에디터 정규환입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제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고, 퀴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며 글을 쓰다 보니, 어떤 질문이나 맥락에서도 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돼요. 글쓰기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고 기록으로 남는 게 정말 큰 의미가 있죠. 그래서 제 글쓰기의 중심은 항상 제 이야기입니다. 웹진, 블로그, 팟캐스트, 출판물 등 모든 매체에서 중요한 건 제가 겪고 보고 느낀 것을 제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가공된 형태일지라도 제 개인적인 시선이 반영되는 게 핵심이죠.”

▲ 남선미, 〈기록 너머의 연대〉의 중에서

<전시 정보>

— 1994년부터 시작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를 돌아보며

▶ 일시: 2025.02.07.— 02.16.

▶ 12:00 — 21:00 (휴무일 없음, 일정 참고)

▶ 장소: 윈드밀 (용산구 원효로13, 지하 2층)

처음 적힌 흔적을 들여다봅니다. 남자와 남자의 성적 활력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처럼, 곳곳에 흘려 둔 매력들을 알게 됩니다. 욕망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지만 동시에 친구로 만들며, 사랑이 이루어지든 어긋나든 우리는 자세를 다시 잡고 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흘린 눈물과 시간의 흐름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자 ‘친구사이’의 눈길은 밖으로 흘렀습니다. 나보다 앞서 있던 남자들은, 자신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길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준비하며 우리는 30년간의 기록 속에서 끊임없이 ‘잘 흘리는 삶’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미래를 직조할 수 있도록 ‘흘리는 연습’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 기록을 오랫동안 매만지던 역사학자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을 물으며, 수많은 자료를 따라갈 수 있도록 분류했습니다. 감정의 아카이브/일상을 유지하는 힘/사랑을 둘러싼 정념/세상에 선보이기/얼떨결에 어울리기/미래에 대한 열병이 그 갈래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기억과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그에게 북극성이 되어줄 여섯 장의 사진을 요청했습니다.

** 한 미술가는 자신을 성소수자로 감지하고서야 밀려오는 기록들이 버거웠습니다. 과거란 실로 거대하고도 애틋한 시공간이어서, 그대로 쌓이거나 망각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내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잘 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어처구니 없는 연표를 구상했습니다. 또한 막막함 속에서 길을 찾아주는 등대를 피웠습니다.

*** 소식지가 내용의 유산일 뿐만 아니라, 디자인 형식의 유산이라 여기는 북디자이너는 2001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에 온라인으로 발행된 기사가 유실된 사실을 곱씹었습니다. 그는 종종 미래의 출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자문했지만, 존재양식의 유약함을 고민할 때마다 조급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을 엮은이, 소장자, 퀴어 출판의 동료가 되게끔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 침대에 누워서 소식지를 읽던 번역가이자 출판 발행인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자신처럼 게이가 아니지만 퀴어 출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록들의 의미가 무엇일지 상상했습니다. 학습하듯 꼼꼼히 챙겨읽는 사람이든 소식지 글을 출처미상의 상태로 보게 된 사람이든, 오래 머금게 되는 말 한 마디가 퀴어 출판을 재생산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잘 흘리는 내일’을 기대하며 각자의 연습을 둘러볼 때, 우리는 다시금 전시장에 깔린 어둠을 응시하기로 약속합니다. 등대를 켜겠다던 한 미술가의 말은 수많은 사람이 엮었던 글과 미처 챙겨오지 못한 기록을 더듬거리고 있습니다. 등대를 되새기던 누군가는 자신을 알리는 또다른 빛을 우리에게 쏘아주리라 기대합니다.

친구사이 소식지는?

1994년부터 발행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는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동성애자인권단체 초동회의 소식지를 이어받았다. 당시에는 비범한 의지나 전문적인 체계가 친구사이 소식지를 이끄는 동력이 아니었다. 많은 성소수자가 일상적 삶에서 억눌린 정체성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숨통이 트이게 돕는 환기구의 역할이 연속간행물의 주목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94년 2월 7일에는 초동회가 친구사이와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분리‧발족했고, 같은 해 3월 친구사이가 첫 소식지를 발간하였다.

이번 전시 《흘리는 연습》에서는 1993년부터 2024년까지 친구사이 소식지에 기록된 2,240편의 글 중, 145건을 선정하여 6가지의 분류기준에 따라 웹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중 32건의 기사는 원본을 재인쇄하여 전시장에서 종이 자료로 열람할 수 있다. 아마추어 비전공자들의 출판이 사람을 모으고 정보를 공유했던 방식을 ‘흘리기’라고 칭하듯 관객들은 흘리는 일에 숙련될 수밖에 없었던 소식지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획/글: 박민영

협력기획: 김대현, 남선미, 심기용, 이경민, 이종걸

자료제공: 친구사이 소식지팀

공간 디자인: naca (김혜정)

포스터 디자인: 이경민

번역: 한윤하

후원: 서울문화재단

▶ 연혁 정리:

1994년-2014년 5월 연혁 | 20주년사

2014년 5월-2024년 12월 연혁 | 이종걸 정리

▶ 아카이브 테이블, 32개의 글:

글 선정 및 분류 | 김대현, 심기용

인쇄물 디자인 | 이주현

▶ 김대현, 〈별 별 별 별 별 별〉

기획 제안 | 박민영

편집•제작 도움 | 임다울

▶ 남선미, 〈기록 너머의 연대〉

인터뷰이 | 연혜원(퀴어매거진 them), 곽예인(우프), 철민(플래그페이퍼), 정규환(에디터, 전 친구사이 소식지 팀원)

▶ 박민영, 〈글레이즈드 사각 언니〉

인터뷰이 | 기용, 슈가, 윤우, 일지, 진수, 현우

촬영감독 | 이도현

작곡가 | Arexibo (아렉시보)

음악 마스터링 | 이정건(INDYM)

3D 그래픽 | 김희경

▶ 박민영, 〈어둑서니〉 연작

금속공예가 | 이우연, 이재호, 김승현

▶ 이경민, 〈친구사이 소식지 – 흘리는 연습판〉

글 선정 | 김대현

개발 및 디자인 | 김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