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열어드립니다.

2024년 08월 10일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고 싶은 시간이 있나요?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던 고등학교 교실의 오후, 실수투성이였지만 모든 게 새롭고 설렜던 스무 살, 혹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그 이전으로요. ‘시간여행사’라고 쓰여있는 사진관 간판에 보고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사인지, 사진관인지 헷갈릴 수도 있는데 누군가 이곳을 진짜 시간여행 보내주는 곳인 줄 알고 오면 어떡할까 하고요. 엉뚱한 생각이지만 분명 이곳의 주인장도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 곳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서울 대학로에서 1960년대 빈티지 무드 콘셉트의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하기 사진가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기가 정말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진관인가요?

네, 맞아요. 이곳의 실제 위치는 대학로 소나무길 3층이지만, 가상의 위치는 알프스 산의 중턱이에요. 오스트리아에서 보고 매료된 짙은 초록과 노란색 조합을 바탕으로 알프스 중턱에 위치한 기차역을 상상하며 인테리어를 꾸며봤어요. 실제로 촬영하기 전엔 손님들께 이렇게 말씀을 드려요. “시간여행 버튼을 누르면 골동 시계와 창문에 동시에 불빛이 들어올 거예요. 자, 그럼 지금부터 여행을 시작할게요.”

마치 테마파크의 놀이 기구를 타러 온 것 같기도 하고, 가본 적은 없지만 유럽의 가정집에 방문한 착각이 드는 것 같아요. ‘시간여행’ 세계관에 진심인 사진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제가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큰 사고를 쳐본 적 없는 모범생 코스대로 살았었거든요.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정해진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골몰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시간의 속도에 휩쓸려서 사는 것보다, 내가 있고 싶은 세계에 놓여있고 싶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가보고 싶은 시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싶다는 감각을 사진과 사진관을 통해 공유하게 되었어요. 

자신의 철학을 녹여낸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거네요. 아직 대학생이라고 들었어요. 전공은 경영학이고요. 사진가로 일하고, 스튜디오 차리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어머니가 1990년대에 쓰시던 필름 카메라로 우연하게 사진 촬영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세계 여행 경비 좀 벌어 볼 요량이었는데, 주변의 친구부터 시작해서 SNS을 통해서 모르는 분들한테도 촬영 제안을 받으면서 조금씩 돈을 벌게 됐죠. 스튜디오가 없던 때는 어떻게든 돈을 모으고 싶어서 서울숲, 한강공원, 서촌을 오가며 하루에 세 장소에서 촬영을 한 적도 있어요. 야외 촬영을 하고 기진맥진한 날들이 많았죠. 스튜디오를 빌려도 제 공간이 아니다 보니까 제 손님처럼 환대를 못 해드리는 게 늘 아쉬워서 촬영하며 모은 돈으로 스튜디오를 직접 열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동네 사진관의 풍경도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명색이 사진관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포털 사이트에 사진관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콘셉트 사진을 찍는 곳인지 모르고 방문해 주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요청하면 증명사진이나 여권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거든요. 한번은 아버지와 어린 자녀분이 함께 비자 사진을 찍으러 오셨다가 ‘그럼, 우리도 한번 찍어볼까’라며 시간여행 컨셉 사진도 찍으신 적이 있어요. 촬영을 잘 마치고 나서 “사진관이 밖에서 잘 안 보이는데, 장사는 잘되세요?”라며 저를 진지하게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괜찮습니다. 인터넷 장사여서요.”라며 사진관의 정체에 대해 설명을 드렸더니 본인도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걸 한번 해볼 걸 그랬다며 부럽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괜히 ‘그래도 나 낭만적인 일을 하고 있었지’ 스스로 뿌듯했던 기억이 나요.

두 사람도 훗날 잊지 못할 경험을 했을 것 같네요. 사람은 저마다의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잖아요.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는 언제예요?

디즈니의 뮤지컬 영화 <메리 포핀스>(1964)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요.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2D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여행하는 동화 같은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가장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사운드 오브 뮤직>(1965)처럼 길을 걷다가 뮤지컬이 시작되는 영화 속 낭만적인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두 영화에 나오는 1960년대 의상을 지금 입는 것도 물론 지금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일상에선 힘껏 꾸미고 싶어도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모습이 자연스러운 시대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어요.

영화처럼 자신만의 세계관을 현실화하고 꾸려가는 일은 어떤지 궁금해요.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저도 누가 제게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물어보면 사진가 또는 작가라고 스스로 표현하는 게 여전히 낯설고 어렵더라고요. 저처럼 자신의 직업이나 존재를 명사형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 또는 문장의 마침표 못 찍고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익숙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나타내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저에겐 이 공간이 현재의 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공간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됐고, 하기님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천상 아이디어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걸 어떻게 다 정리하세요?

그게 제 숙명 중 하나인데요. 제 성향상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거의 쓰나미처럼 와서 생각을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거든요. 하나에 꽂히면 반드시 밤을 새워야 잘 수 있는 성격이라, 특히 사진관 운영 초반에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고민이었어요. 아이디어도 많은데 당장에 이 모든 걸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압도감이나 조급함이 생겼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해요?

일단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해요. 기록하면서 기획안을 간단하게 써놓으면 결국에는 나중에 시간 여유가 생길 때 다 소화가 되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더 잘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라든가, 제 능력, 또는 연결되는 사람들이 생기니까요. 분명 처음에 씨앗 단계였던 아이디어들이 결국에는 숙성된 열매처럼 결실을 맺게 되더라고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와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디어가 있으면 우선 힘을 빼고 실현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중요한 콘셉트를 발견하는 것도 팁이에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도와 도전들도 기대되네요. 그럼 마지막 질문으로, 하기 시간여행사의 가장 큰 매력은 뭐라고 생각해요?

‘환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진관을 찾는 손님 중에는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분도 많아요.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힐 때는 자신의 콤플렉스까지 드러내야 하고, 내 모습을 타인이 어떻게 판단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취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촬영할 때만큼은 손님이 긴장하지 않도록 저는 그 무엇 하나 판단하지 않을 거라는 걸 몸과 마음으로 보여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쁜 사진도 중요하지만, 사진을 찍는 일련의 과정이 여행처럼 디자인되면 좋겠어요.


<시간여행사의 일상>

#사진관의 시작

벽 모퉁이에 걸린 골동 시계는 하기 시간여행사 사진관 콘셉트의 시초다. 시간여행사는 사진관을 만들기 전, 사진 촬영을 하며 모든 돈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처음 방문했던 포르투갈 포르투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이 시계를 발견했다. “시계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을 기차역처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시계를 구입한 뒤 두 달 동안의 여행 내내 들고 다니는 바람에 결국 시계는 캐리어 안에서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됐지만, 가상의 기차역인 이곳에서 시간을 멈춘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시간수집가로 살아가기

빈티지 컨셉의 사진을 찍기 위해선 배경과 인물에 어울리는 의상과 소품이 필수다. 사진관에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산 빈티지 드레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산 전통의상까지. 안쪽의 흰 나무 의자는 미국의 50년대 부엌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구할 수 있는 데가 없어서 직접 주문 제작했다. 촬영할 때 쓰는 케이크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기도 한다. LP부터 조명, 각종 장식품도 청계천과 동묘 일대의 벼룩시장을 오가며 사진관에 어울리는 걸로 찾았다.

#1960년대 빈티지 잡지 속으로

요즘은 하기 시간여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1960년대 빈티지 잡지 스타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아름드리 꽃이 가득한 정원을 가꾸는 유럽 시골 소녀부터 미국 사립학교의 스쿨룩까지. “지금 제가 빅이슈코리아에 인터뷰하는 것처럼 손님들에게 잡지를 만들어 드리면 훗날 추억이 되는 거잖아요. 사진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나 감정이 기록되는 거니까요.”라는 말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느린 마음과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하기 시간여행사 @hagi.film


Big Issue Korea Vol. 326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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