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말하는 방법

2024년 12월 22일

HIV 감염 고백한 친구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몇 년 전, 한 친구가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사실을 커밍아웃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감염 사실을 털어놓은 지인은 몇몇 있었지만, 사적인 친구가 개인적으로 이런 고백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나를 한낮의 카페로 불러내 그동안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순간 걱정이 앞섰다. 친구의 현재 건강 상태가 괜찮은지, 일하는 데 지장은 없는지도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평소 신체적으로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던 친구이기에 놀라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큰일 아닌 것처럼 친구의 말을 들었지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HIV에 편견이 없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곁의 HIV/AIDS

▲ 영화 <120BPM> 스틸컷

그 친구가 커밍아웃하기 몇 달 전, 우리는 영화 < 120BPM >을 같이 관람했다. < 120BPM >은 HIV/AIDS 공포가 확산되던 1980년대 말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인권 활동가들의 제약회사를 향한 투쟁과 인물들의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심장을 뛰게 만드는 비트의 하우스 음악, 그리고 클럽 속에서 함께 뒤섞여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영화는 클럽 안에 부유하는 먼지를 보다 자세하게 보여주는데, 공기 중의 먼지가 마치 감염인과 바이러스를 은유하는 듯했다. 바이러스도 먼지처럼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서 한데 뒤섞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HIV는 공기 중으로 전파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이러스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HIV/AIDS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이나 낙인이다.

로빈 캉필로 감독의 < 120BPM >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2017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사실 감염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는 꽤 많다. 전설적인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였고, 그가 에이즈 때문에 사망한 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잘 담겨있다. 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에이즈 환자 역할을 연기해 제8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나, 밴드 비틀즈를 성장시킨 전설적인 프로듀서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실화를 다룬 <마이다스 맨>도 있다. 이들 작품은 단지 비극으로서 감염인의 삶을 그리지 않고,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고충과 존엄을 전달한다.

최근 방영된 티빙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주인공 ‘고영(남윤수)’도 HIV 감염인이었다. 드라마는 HIV가 주인공의 삶과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심하게 보여줬다. 극중 고영의 남자친구인 규호(진효은)는 그가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고영은 회사의 채용 검사를 통해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어려움을 겪었고, 태국에서 불법적으로 치료제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비밀을 이야기하는 방법

▲ 영화 <비밀을 이야기하는 방법> 스틸컷

11월 서울 국제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상영한 <비밀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감염인을 향한 사회적인 낙인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아일랜드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은 감염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들 중 에이즈 팬데믹을 안 겪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국민투표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이 곳에서도 HIV 이야기는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주제다. 이런 환경에서 숀 던 감독은 감염인들의 실제 사연을 재구성해 다큐멘터리로 풀어냈다.

새삼 감염인 친구의 고백과 위의 여러 작품이 떠오른 건 어느새 12월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1일은 감염인 HIV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나누는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다. 인권 활동가들은 이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이라고도 부른다. 감염인이 이 사회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의 지금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HIV는 올바른 예방과 정보가 없다면 감염인 뿐 아니라 비감염인도 막연한 불안함에 시달릴 수 있다.

사실 HIV에 감염 됐다고 바로 에이즈(AIDS, 후천면역결핍증후군) 상태가 되는 건 아니다. 올바른 치료와 더불어 건강을 잘 관리하면 불치병이 아닌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이 된다. HIV 감염 이후에도 치료제를 잘 복용하면 바이러스가 미검출에 가까운 수준이 된다. HIV 관련 단체 등이 ‘U=U'(Undetectable·검출되지 않은 = Untransmittable·전염시킬 수 없는)라는 단어로 캠페인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HIV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방법도 있다. HIV 예방 요법 ‘프렙(PrEP·노출 전 예방요법)’이다. 프렙은 ‘노출 전 예방'(Pre-Exposure Prophylaxis)의 약자로 HIV에 감염되지 않도록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을 복용하거나 주사하는 방식이다. 간편하지만 그동안 주위 감염인 친구들이 편하게 프렙을 활용하지 못했던 건 비싼 비용과 개인정보가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질병관리청이 HIV 감염 예방 경구약(먹는 약) 복용자 본인부담금 일부를 부담하는 시범사업을 이달 27일까지 한다고 발표했다.

프렙은 HIV 검진과 더불어 감염인과 파트너,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를 덜어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감염인이 그 사실을 숨기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을수록 음지에서 전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프렙과 관련한 뉴스를 보며 감염인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내게 감염 사실을 털어놓기 전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생각하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가볍게 자신의 감염 사실을 이야기 하는 사회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를 비밀로 간직하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는 건 작지만 큰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HIV/AIDS 감염인과 이들의 파트너와 친구는 결국 우리 사회의 일부다. 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더 많이 자주 이 이야기를 나누기를 고대한다.

[정규환의 다르게 보기]

오마이뉴스에 격주로 연재됩니다.

코멘트

0 thoughts on "비밀을 말하는 방법"

    아직 코멘트가 없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관련된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