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세’에 대하여

2025년 02월 06일

응원봉·케이팝 가득했던 집회, 왜 익숙하냐면요

윤석열 대통령의 첫 번째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었던 12월 7일 토요일 저녁, 나는 국회 정문 앞에 있었다. 여당의 표결 불참으로 인한 정족수 미달로 부결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입장해 탄핵안에 투표하기를 바라며 구호를 외쳤다. 김상욱 국회의원이 돌아와 표결에 참여했을 때 국회 앞은 환호로 가득 찼다. 마치 탄핵안 표결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외침이 그들에게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

집회 주최 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케이팝 음악을 틀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에스파의 ‘위플래쉬’, 로제&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등이 차례대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많은 시민들은 가사를 따라 부르고,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이 분위기 대로라면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밝을 땐 잘 보이지 않았던 응원봉의 빛깔이 넘실댔다. 집회에 처음 참가했다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신나는 거야?” 사람들의 표정은 절망적이라기 보다 앞으로 지치지 않고 힘을 모으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신나게 투쟁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성소수자 단체의 시위 피켓

이번 집회에서 도드라진, 암울한 현실에서도 즐겁게 투쟁하는 분위기가 개인적으로 익숙했던 건, 매년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서 마주 해온 방식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젊은 세대의 비중이 높다는 점, 저마다 자신을 드러내는 빛나는 도구를 들고나온다는 점, 그리고 케이팝 음악을 튼다는 점이 유사했다. 성소수자들은 꾸준히 형형색색의 무지개 깃발을 들고 신나게 투쟁해왔고, 그 플레이리스트엔 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한 케이팝 음악들이 담겨있었다.

언론들이 앞다퉈 주목하고 있는 오늘날 집회 문화 이면엔 자신들이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이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한국의 성소수자와 그 지지자들은 매해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 자신들만의 집회 문화를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을 유행으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공동체 안에서 공유해온 음악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전파해왔기 때문이다.

퀴어문화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도심 행진이고, 스피커가 달린 트럭에서 음악을 틀면 수만 명의 참가자들이 그 뒤를 따라 걷는다. 그 풍경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 중 하나인 이들의 집회가 어째서 이렇게 신나고,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한지 아이러니다. 이번 탄핵 집회가 계엄이라는 절망에 굴하지 않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케이팝 아이돌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4시, 윤석열 대통령의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을 때 흘러나온 음악은 ‘다시 만난 세계’였다. 대통령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세우고, 음모론에 경도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과 반대로 시민들은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음악으로부터 희망의 메시지를 재발견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집회 중심에 2030 여성들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있었다. 다양하지만 하나 된 목소리로 ‘다시 만난 세계’를 함께 부르는 광장에서 희망을 나눴다.

소녀의 꿈은 영원하다

▲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의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이번 집회를 계기로 2007년 8월 발표된 이 노래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사람들이 많다. 소녀시대의 데뷔곡인 이 노래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려면 뮤직비디오를 함께 봐야 한다. 뮤직비디오엔 파일럿, 바리스타, 댄서 등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9명의 소녀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라기엔 다소 착하고 임팩트가 부족한, 꿈을 가진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이 노래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만 해도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데뷔 전부터 케이팝 아이돌을 대표하는 회사 SM엔터테인먼트이 야심 차게 선보이는 9인조 걸그룹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소속사의 동방신기나 보아처럼 센 콘셉트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쉬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 9명이라는 당시로선 실험적인 멤버의 수를 고려한 듯 음악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각인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파트 분배, 그리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외모와 심플한 의상 콘셉트를 선보였다. 이 모든 건 당시 유행과 대치됐다.

이를 증명하듯 불과 한 달 뒤에 공개된 원더걸스의 ‘Tell me’가 기록적인 히트를 쳤다. 원더걸스는 복고라는 통통 튀는 콘셉트와 따라 추기 쉬운 춤, 중독성 있는 가사와 멜로디로 전 세대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2세대 케이팝 걸그룹의 전성시대를 연 것은 원더걸스로 기록되었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에 가려져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흐른 뒤 2009년에서야 대중성을 겨냥해 발표한 ‘Gee’가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그룹으로 인정받게 된다.

다시 만난 음악의 운명

▲ 윤석열 탄핵 투표 가결, 꺼지지 않는 응원봉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에서 탄핵 투표가 가결된 뒤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비록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다시 만난 세계’는 ‘소녀’의 정체성을 잘 담은, 데뷔하는 아이돌의 초심을 떠올릴 수 있는 설렘과 도전의 메시지를 표현한 곡으로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재평가 받아 왔다. 그리고 그저 추억의 음악으로 간직될 뻔한 이 음악의 운명은 언젠가부터 집회 현장에서 들리기 시작하면서 민중가요로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잘 알려진 계기는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한 시위였다. 학교와 공권력에 저항하는 상황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어느덧 대학생이 된 과거의 소녀들이 소환한 것이다.

2024년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구원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다고 전했다. 평범한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소설에서만 존재할 줄만 알았던 비상계엄을 2024년 경험할 줄 예상하지 못했고, 국가의 폭력성과 대통령의 광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국민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힘을 모아 저항했다.

‘다시 만난 세계’의 울림도 과거로부터 현재로 다시 도착했다. ‘소녀들이여, 꿈을 잃지 말라’는 그 메시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녹슬지 않았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이라는 첫 가사는 마치 과거에서 현재로 전하는 이야기같다. 그리고 모두의 어린 시절, 마음속에 간직했던 꿈이 있는 한 이 음악은 앞으로도 다음 세대에 전해질 것이다.

[정규환의 다르게 보기]

오마이뉴스에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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