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도 재건축이 되나요?

2025년 05월 11일

길가를 지나다 개나리, 장미, 목련 같은 꽃 이름을 가진 아파트를 발견하면 괜히 반가워요. 지금은 아파트 브랜드 이름과 외래어가 혼재된 아파트가 많지만, 과거엔 분명 자연의 이름을 넣는 게 유행이었던 게 분명해요. 언젠가부터 집이 주거를 위한 공간을 넘어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면서 아파트 이름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표현보다는 남들과 구별 짓는 두는 마케팅 요소가 되었죠. 그런데 만약 내가 집의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까요? 해가 지는 곳의 노을 아파트, 한강 근처의 윤슬 아파트, 산책하기 좋은 공원 아파트 등을 혼자서 생각해 봤어요. 누군가는 이제는 표현을 두고 예스럽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일상에도 그런 서정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재건축을 앞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정민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봄이라서 그런지 아파트 단지 밖까지 벚꽃 잎이 흩날리더라고요. 단지 안의 고목들이 운치를 더하는데, 오래된 아파트인 이 집에 정민 님이 살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그 당시 다니던 회사가 서울역 근처에 있었어요. 출퇴근하기에 괜찮은 동네가 후암동 이나 효창공원 등 용산구 인근이었는데요. 이사할 집을 알아보다가 이곳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솔직히 말하면 재건축 예정 아파트라서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이 안 좋았어요. 요즘 같은 봄엔 오래된 매력이 느껴지지만, 그때는 하필 처음 본 날 비가 왔는데 건물 외벽 페인트칠을 안 한 콘크리트 색깔이 어둡게 도드라져서 안 예뻤거든요.

처음 독립할 집을 구하는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는 거 같아요.

맞아요. 이 집 외에도 인근 주변을 많이 돌아봤는데 제 예산에 맞는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집을 구한 분들은 공감할 텐데 집을 보러 다니는 게 행복한 일은 아니잖아요. 왜냐하면 부동산에선 내가 가진 돈의 만큼의 집을 보여주고. 그게 마치 ‘지금 너의 삶에는 이 집이 가장 어울려’라고 평가받는 기분이 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으로 이사를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다행히 실제 집 안을 보니 제가 봤던 집 중에서는 크기가 괜찮았어요. 사회 초년생이었던 제게 전셋값의 부담이 적은 것도 메리트였고요. 그리고 그 전에 살던 집은 나무 창호인 탓에 외풍이 들어와 겨울에 힘들었는데, 이 집은 베란다가 있고 창호도 튼튼해서 겨울철에도 따뜻할 거 같았어요. 무엇보다 벽지를 새로 바르고 바닥 장판을 하고 조금만 손보면 꽤 살만할 것 같은 거예요. 책상, 침대 같은 가구가 들어갈 위치가 딱 보였달까요? 이 집에 이사 온 시점이 취업 6개월 정도 됐을 때거든요. 그전까지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해서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가 없었어요. 새집으로 이사하니까 빨리 가구나 조명, 식물을 구입하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가 컸어요.

어차피 곧 재건축 예정인 집이니 벽에 못을 박거나 인테리어에 도전하기에도 오히려 좋았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살면서 정민 님이 인테리어한 곳이 있나요?

2년 전에 화장실 인테리어를 새로 했어요. 살다 보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잖아요. 속상한 일이 생겨서 그동안 미뤄왔던 화장실 인테리어를 했는데 그때 하기를 참 잘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화장실 상태가 처음부터 심각했거든요. 집에 친구를 초대할 때도 화장실 때문에 부르기가 싫을 정도였어요. 전셋집이라고 해도 만약 생활에 영향을 주는 하자가 있으면 인테리어는 차라리 일찍 해서 오래도록 편하게 낫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정민 님이 건축 사무소에도 일한 경험이 있으므로 인테리어 과정도 수월하게 진행했을 거 같은데요.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들 특유의 고집이 있어요. 화장실 시공은 업체에 맡기고 벽에 붙일 타일은 제가 고르기로 했는데요.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초록색으로 골랐더니, 사장님이 다른 색과 투톤 배치를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저는 제 취향대로 한 가지 색으로 하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그렇게는 안 해주신다는 걸 힘들게 설득했어요. 그리고 지금 거실 천장 벽지가 회색인데, 보통 천장은 흰색으로 많이들 하거든요. 제가 통일된 색깔을 원하니까 벽지 집에서도 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발 그냥 해주세요. 제가 돈 드리잖아요’ 정도로 읍소했던 게 기억이 나요. 전문가인 사장님들의 말에 따라야 할 때도 있지만 취향의 문제에선 제 의견을 관철하는 게 중요했던 기억이 나요.

유튜브 ‘서울은 이상한 도시’ 채널에서 ‘월세 아니면 전세’라는 인터뷰 콘텐츠를 진행했잖아요. 지금, 이 인터뷰 코너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은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보는 내용이었는데, 다양한 생활양식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나요?

그전까지만 해도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좋아한다고 상상하지 못했었어요. 제가 만났던 한 분은 전셋집의 바닥 카펫부터 가구의 시트지 하나하나 직접 집을 꾸미시는 분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집을 좋아하고, 애정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거든요. 또 다른 친구는 집안에 자신의 이름을 건 조그마한 바와 칵테일 메뉴를 만들고서 대접하는 걸 보고 솔직히 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초대하고 환대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였고 그게 결국 자신의 집을 대하는 태도라는 걸 다시 느꼈어요.

사람마다 집을 대하는 태도도 다양한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정민 님은 오늘 인터뷰를 위해 집 정리를 하셨다고 했잖아요. 저도 친구들 집에 가면 정리하는 방법도 정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걸 느끼는데, 정민 님만의 방식이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정리하는 기준은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정리가 된 거예요. 제가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누군가 보면 정리라고 할 수 없지만 물건이 바닥에 있지 않고 어쨌든 선반 위에 있으면 저 위치가 물건의 위치예요. 물론 위치가 자주 바뀔 뿐인 거죠. 말은 이렇게 해도 정리하는 게 힘들어서 지금 구석구석은 처치 곤란이에요. 사실 제가 물건을 못 버리는 편이거든요.

그래도 집에 귀여운 물건이 많으면 좋잖아요.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삶은 어때요?

처음에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는 이렇게 집이 물건으로 꽉 차지 않았어요. 살다 보니까 짐이 자꾸 많아지더라고요. 벽들이 점점 이렇게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집이 원래 이렇게 좁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생각해도 이 중에는 쓸데없는 물건도 많다는 걸 충분히 알거든요. 그런데 물건 사는 걸 못 멈추겠어요. 제가 크고 비싼 걸 사서 모으는 게 아니라 작은 걸 많이 사서 탕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예를 들어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 모자를 샀는데 그때 말고 쓸 일이 당연히 없을 거 아니에요? 꽂히면 그런 물건도 스스럼없이 사는 편이랍니다.

그럼, 이 집에 있는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은 뭐예요?

이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베란다를 가려주는 초록색 벨벳 커튼이에요. 종종 저녁에 친구들이 놀러 오면 커튼을 다 치거든요. 색깔이랑 소재가 무거운 느낌이라서 공간의 분위기가 아늑해져요. 커튼을 치고 문을 닫으면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집의 방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의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을 좋아해요.

귀여운 걸 좋아하고, 다양한 색깔을 마다하지 않는 정민 님만의 철학이 있는 거잖아요. 그만큼 관심사도 많으므로 지금 다양한 일을 하는 걸까요?

맞아요. 저는 관심사가 많고 다양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대학원생이면서 도시 연구자로 살고 있는데요. 학부 때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 사무소에서 4년 정도 일을 한 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 작가로 미술 전시도 하고, 책도 출간했어요. 좋게 말하면 다방면으로 재능있는 사람인데 자존감이 높을 때는 ‘난 잘하는 게 많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낮을 때는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작은 육각형이야’라고 생각하곤 해요.

지난해 발간한 책 <즐거운 남의 집>(이윤석, 김정민 지음)은 ‘남의 집의 이야기지만 곧 나의 집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됐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집에 살면서 내 집으로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나요?

아파트 안에서 중요한 결정을 있을 때 주민투표를 하잖아요. 제가 이 집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때, 물탱크를 교체할지 말지 투표했는데요. 제가 무심코 ‘세입자라서 안 할게요’라고 말했는데 관리 사무소 직원 분이 ‘무슨 말이에요?’ 세입자가 사는 사람인데 투표해야죠‘라고 하신 말이 울림이 있었어요. 생각해 보니 집주인이 이 집에 사는 건 아니니까,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은 살고 있는 내 의사가 중요한 게 맞겠구나, 개인적으로는 그때 내 집에 관한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마당이 있는 경기도의 본가에서 자라 서울의 고시원과 셰어하우스까지 다양한 주거 형태를 거치고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는 정민 님에게 이 집은 어떻게 기억될지, 다음 집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내가 이 집에 쌓은 녹이 얼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지금보다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사회 초년생 때부터 살았던 집이어서 그런지 다음 집에는 조금 더 생활환경이 좋은 곳으로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침실이 침대와 옷장으로 꽉 차 있어서 침실과 옷장이 분리된 집을 원해요. 지금 제가 삼십 대 중반인데 예전에 생각했던 제 나이대의 집은 이것보다 큰 집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의 저는 주거와 경제적인 면에서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시기인 것 같아요.

끝으로,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가가 아닌 전세나 월세에 사는데, ‘빌린 집에서 내 집처럼 산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내 집 같다’라는 말에는 인테리어처럼 어느 정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사실은 주거 안정성의 문제인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집이면 2년 이상은 살 수 있는 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빌린 집이라고 해도 전세나 월세를 급격하게 올리지 않고 미래를 그리며 살 수 있는 안정감이 집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 집처럼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아요.

김정민 @jminutemaid

Big Issue Korea Vol. 335

글: 정규환

사진: 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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