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들

2024년 07월 16일


어두운 곳에서 보다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꿈이나 사진 같은 것들이요.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 반드시 암실이라는 어둠을 거쳐야 해요. 그것이 필름 사진만이 가진 감성과 매력을 드러내죠. 매일 밤 잠에 들고, 조각난 필름 같은 꿈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듯, 어둠이 필요할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시간을 창작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자신이 만든 어두운 공간에 자신이 만든 옷과 사진을 담고 있는 친구, 강민의 집을 찾았습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거실은 환한데 방은 어두워서 신기했어요. 그 안에 옷과 사진, 소품들이 공간에 잘 진열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전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집을 구할 때 읽었던 책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 예찬>이었는데요. 빛보다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책이에요. 사람들은 주로 밝은 부분만 생각하지만 오히려 감추기의 미학을 중시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최대한 집을 암실처럼 어둡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 공간에서 스스로를 놓지 않기 위해서 제가 지키고 있는 선인 것 같아요. 벽에 걸어둔 옷과 사진처럼 제가 만든 것들이 최대한 제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간을 나름대로 꾸며봤어요.

그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소파 위에 대칭적으로 걸려있는 두 사진이었어요. 흔들린 초점, 두 잔의 하얀색 커피잔이 올려진 테이블,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걸 물어봐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웃음). 한국 돌아오기 전, 일본에서 사귀던 친구와 마지막 여행을 교토에서 했는데요. 교토라는 도시 자체가 어딘가 서늘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이별을 이야기하는 그날의 한 장면, 장면이 묘하게 슬픈 감정으로 남았어요. 아래에 숲 사진은 교토의 금각사 인근에 있는 일왕의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랄까 영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숲이라는 공간이 개방적이지만 동시에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실제로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촬영했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더 좋더라고요. 

스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7년 정도 생활하다가 한국 들어온 지 4년 정도 됐다고 했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강민의 첫인상은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편견이지만 처음엔 일본 사람인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요.

한국에서 살 때 뭔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해야 되나, 사람들 간의 거리감이 가깝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배려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 같아요. 어렸을 때는 마음이 약해서 그랬던 것 같고 지금은 적응해서 괜찮아요(웃음). 타국에서 유학을 하다 보니까 낯선 환경에서 아무래도 사람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생기더라고요. 언어 자체에 배어있기도 한 것 같고요. 아무리 친해지더라도 언어, 문화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렸을 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성인이 되어서 한다는 건,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거 같은데요.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실험적인 옷을 만든다거나 종종 특별하게 묘사되기도 하잖아요. 현재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패션을 하려면 유학을 가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다행히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을 갈 수 있게 됐고요. 빨리 일을 배우고 싶어서 여러 브랜드에서 도제식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졸업 후엔 패턴사로 일을 시작하게 됐고요. 옷을 만드는 데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많이 필요한데요. 예를 들어, 디자이너가 원피스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디자인을 그리고 가슴둘레, 기장 등의 수치를 패턴사에게 전달해요. 그 수치를 바탕으로 디자이너가 원하는 이미지에 최대한 가깝게 옷을 설계하는 게 패턴사의 일이에요. 지금은 패턴사 일은 안 하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옷도 하나의 자기표현 수단이잖아요. 영감은 어디서 받아요?

제가 공부했던 학교가 디자이너의 미적 원천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카운슬링하는 걸 중시하는 곳이었어요. 한국에서 대학교 신입생 때,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서 반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는데요. 옷을 걸 만한 곳도 없는, 그래서 제 옷에 주름이 늘 많았어요. 그 주름이 다소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시기를 잘 견딘 느낌이 들게 하는 요소예요. 그 당시 옷을 만들 때 옷에 주름을 어떻게 녹여낼지가 포인트였거든요. 슈트 안에 의도적으로 주름을 준다든지 연구를 많이 해서 옷을 만들었고, 의미 있는 상도 받았어요.

옷을 만들고, 사진을 찍다 보면 확실히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살고 있는 도시에도 그 시각이 투영되는지도 궁금해요. 강민에겐 도쿄, 서울도 낯선 도시긴 하잖아요.


전주에서 살다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적응했지만, 처음엔 약간 무섭다는 느낌이 많았어요. 대도시 자체가 약간 차갑고 날카롭다는 이미지는 항상 있거든요. 물론 도쿄도 대도시이긴 하지만, 그쪽은 느껴지는 빛 자체가 주황빛이 도는, 약간 따뜻한 느낌이 있거든요. 대신 서울은 많이 개발된 구역이 있어도 그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오래된 동네처럼 차분해지는 그런 균형감을 좋게 생각해요.

오늘 마포대로에서부터 공덕동 안쪽 골목까지 걸어오는데, 거리의 풍경이 180도 변하더라고요. 8차선의 대로변은 정갈하고, 한쪽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이 골목은 오래된 서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서 정감이 갔어요. 그리고 크고 작은 봉제 공장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서울의 많은 동네 중에 하필 이곳에 이사 오게 된 것도 인연 같네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옷과 관련된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어요. 미싱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집을 알아보다 보니 이 동네가 서울에서 봉제 공장이 모여있는 동네 중 한 곳이라는 걸 알았어요.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늘 건물 안에서 누군가 옷을 만들고 있는 풍경이 보여요.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마다 항상 오토바이로 원단을 나르고, 패턴이 걸려있는 걸 보면 누군가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구나, 하면서 ‘나도 만들어야지’라는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곤 해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아름다움은 뭐라고 생각해요?

사진을 찍을 때나 옷을 만들 때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를 항상 생각해요. 저는 그 행위에서 따뜻함이라든지 다정함을 많이 느끼곤 해요.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제가 느끼는 다정함과 따뜻함이 늘 제가 만드는 것에도 내포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강민의 물건들>


#재봉틀

강민은 2015년 여름방학에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이 재봉틀을 샀다. 물건을 소유하고 처음으로 ‘뿌듯하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저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 소중한 물건이에요.” 인연은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옛말처럼, 재봉틀은 실의 짜임으로 흔적을 남기고, 이 재봉틀로 만든 수많은 옷만큼이나 많은 추억이 있다. “고마운 친구예요. 매년 고장 나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있어요.” 재봉틀이 없으면 옷을 만들 수 없으니까 그에겐 더욱 특별하다. 재봉틀을 활용해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기도 한다. 

#카메라

그가 가장 애용하는 카메라는 CONTAX T2다. 소장하고 있는 여러 카메라 중에서 제일 자주 쓰면서 신뢰하는 기종이다. 2015년도 우연히 옥션에서 구입하게 된 이 카메라 덕분에 사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 사진 찍는 일은 옷을 만드는 일에 비해 부담이 적은 편이라 촬영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어찌 됐든 좋아하고, 잘하게 되면 좋잖아요.” 패션을 더욱 잘하고 싶어서 ‘일단, 찍어보자’라는 가벼운 마인드로 사진을 시작했지만, 대중목욕탕에서의 남성 인물을 담은 사진 시리즈는 매거진 <DAZED> 국내외판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사진은 인스타그램 계정 @kanminkim에 게시된다.

#옷

강민의 집 방 한 칸은 드레스룸이고, 단연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옷의 색은 검은색이다. 그리고 그 위를 살짝 비치는 검은색 천이 가리고 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옷을 한 벌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옷은 옷장이 아닌 침대 맞은편 벽에 걸려있었는데, 마치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이 옷은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다. 강민은 목욕탕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막내아들로 성장했다. 목욕탕을 집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축축하게 젖어 있거나 습기 같은 따뜻한 느낌에 늘 익숙했고, 그것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고. “제가 좋아하는 질감이에요.” 옷 자체에 젖은 느낌을 낼 수 있도록, 천에 실리콘을 결합했다. 입었을 때도 특유의 미끌거리는 질감을 느낄 수 있다.


Big Issue Korea Vol. 325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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