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계속되는 것들

2024년 10월 27일

‘그리고’라는 단어를 쓸 때는 고민이 됩니다. ‘글에는 최대한 부사가 없을수록 좋다’라는 말을 떠올릴 때가 있는데요. ‘그러나’처럼 반전의 역할도 없고, ‘그래서’처럼 결론지어 주지도 않아서 ‘그리고’는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비슷한 내용의 두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말, ‘그리고’는 그리고, 그리고… 천천히 되뇌다 보면 무엇이든지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 뜬금없는 말장난 같지만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 역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보다는 직관적으로, 사진보다는 추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죠. 무언가 그리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다시 곱씹게 되고, 밑그림을 그리다 보면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채색하다 보면, 의외의 선명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림 그리기와 영화를 좋아하고 세상의 많은 색 중에서 파란색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환의 집을 찾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기환님을 일러스트로 먼저 알게 됐어요. 그림을 살펴보는데 유독 파란색이 눈에 띄더라고요. ‘파란색을 좋아하는구나’ 싶었죠. 역시나 오늘 파란색 셔츠를 입고 계시네요. 그런데, 왜 파란색을 좋아해요?

제가 색약이거든요.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색이 파란색이에요. 파란색 중에서도 지금 입고 있는 셔츠의 청록색, ‘터키시 블루’ 같은 색깔을 좋아해요. 파란색 외에 베이지색이나 갈색 같은 따뜻한 색 계열의 옷을 사면 잘 매치를 못하는데, 파란색 계열의 색은 매치하기 편해요. 흔히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 자기가 되고 싶은 이미지라고들 하더라고요. 파랑처럼 청량한 느낌이고 싶어요. 깨끗해 보이잖아요.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색이라고 하니까 애착이 갈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인테리어도 그림처럼 파랑이나 초록 같은 자연의 색이 눈에 띄는 것 같아요.

그동안 자취했던 집들에 전망이 없는 게 스트레스였는데요. 저는 집에서 주로 작업하다 보니까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답답하더라고요. 이번만큼은 무조건 뷰가 있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집을 처음 보자마자 창밖에 은행나무가 보이는 게 마음에 들어 바로 계약하게 됐어요. 인테리어는 일단 일러스트 작업을 해야 되니까 책상이 커야 돼요. 집에 있는 시간이 기니까 가구가 일단 마음에 들어야 하고요. ‘아르텍’의 빈티지 책상과 의자는 볼 때마다 행복해요. 나무 바닥이랑 잘 어울리더라고요.

창문도 하나의 프레임이고, 안팎에서 보이는 풍경이나 계절의 변화가 중요하잖아요. 집에서 일하다 보면 창밖을 보는 시간도 많고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일상은 어때요?

생활과 작업을 한 공간에서 같이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물건이 많아질 수 있는데 이사 오면서 짐을 엄청 버렸어요. 거의 한 3분의 1만 남기고 다 버리고 온 것 같아요. 요즘은 뭔가를 사지 않으려고, 평생 쓸 수 있는 물건만 사자는 주의가 됐어요. 그리고 제가 즉흥적인 편이어서 계획을 안 세우거든요. 일러스트 작업이 어떨 때는 많고, 어떨 때는 적으니까 하루의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거예요. 일단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요. 하루 동안 먹을 양을 텀블러에 담아서 훌쩍훌쩍 마시면서 작업했다가, 산책했다가 다시 작업하다가 안 되면 카페에도 가고 그렇게 밤 10시까지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일종의 루틴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일하기 싫을 땐 어떻게 해요?

진짜 그리기 싫을 때는 안 그려야 되거든요. 오히려 안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럴 때는 산책을 하거나 불광천에서 달리기를 해요. 리프레시가 됐을 때 다시 그림을 그려요. 직장인도 하루 일과 중에 짬짬이 쉬는 시간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 좀 더 길게 잡고 일하고 쉬기를 하루 종일 반복하는 것 같아요.

일상의 장면이 그림의 재료가 되는 거잖아요. 그중에서도 여행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여행을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 간직하는지 궁금해요.

사진보다 그림으로 기록하는 편이에요. 글도 잘 못 쓰고 사진도 못 찍고 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어서 그림으로 최대한 많이 기록하려고 하죠. 친구들이랑 같이 여행 가면 나중에 찍은 사진을 서로 공유하잖아요. 친구들이 막 100장씩 보내도 저는 30장 보내거든요. 그 대신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줘요. 그러면 저와 친구에게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벽에 걸려 있는 이 그림에 대해 소개해 줄 수 있나요?

2017년 겨울, 첫 해외여행을 프랑스로 떠났는데 기억이 별로 안 좋았어요. 날씨도 춥고, 인종차별도 당하고, 기차도 놓치고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는데 겨울만 되면 그렇게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랭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머물렀거든요. 동네에 집들이 옹기종기 있었는데 한가운데 쓰레기통에 화려한 스티커가 붙어 있는 거예요. 무채색인 동네에 포인트처럼 있으니까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리게 됐어요.

영화의 한 장면을 그리기도 하잖아요. 장면이 아름다워서인지, 아니면 그 영화에서 어떤 그 장면이 갖는 의미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그리고 싶은 장면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아무리 지루하고 재미없더라도 사진처럼 머리에 잔상이 남는 영화가 있잖아요. 마음에 남는 장면을 주로 그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림으로 일기 쓰듯 영화 리뷰를 남기거든요. 그림으로 그리는 순간 완전히 제 영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름다운 장면에 제 감상을 더해서 그림으로 남기는 게 저한테도 의미 있는 일 같아요.

좋아하는 영화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선 <괴물>과 <너와 나>가 좋았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플 라이프>가 떠올라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한 사람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재현해 주기 위해서 음악 연주를 연습하는 장면이에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천국으로 거기 전, 머무는 중간역 ‘림보’기 있어요. 일종의 중간 세계인데요. 림보의 직원들이 죽은 사람한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만 남기고 사후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 한 가지 기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하게 돼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골라보라고 하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잖아요.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막상 처음 그런 질문을 들으면 자극적인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처음 갔던 날이라든지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강렬한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소소한 이야기를 꺼내요. 예를 들어 여름방학 때 버스를 타고 시골에 가는 길에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던 그 기억을 남기고 가고 싶다고요. 영화 속에서 그런 기억을 재연해서 상영을 해요. 그리고 그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났을 때 이제 천국으로 가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나의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금일까, 과거에 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언젠가 이 영화가 모든 사람한테 다가오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행복했던 기억을 재연한다는 것, 그 영화처럼 그림을 그리는 일도 비슷하게 다가오기도 하네요. 끝으로, 기환님이 가장 행복함을 느낄 때는 언제예요?

영화제에 가는 게 행복해요. 제가 평소에 무기력한 상태인데 영화제에 가면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 하루에 영화 5편씩 보는 열정이 느껴져서 좋아요. 특히 부산영화제에 가면 눈앞에 유명한 배우들이 지나가도 신경도 안 쓰고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열정적으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자체가 좋아요.

<기환과 일러스트레이션>

#취미, 그리고 일

일러스트레이션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좋은 취미다. 평소보다 색다른 취미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한테 어떤 팁이 있을까? “일단 좋아하는 대상을 그리는 게 중요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영화를 그리고 그 그림을 외부에 공유하길 추천해요.” 그러는 순간 그리는 재미가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기환도 처음에는 친구들과 여행한 사진을 그려서 보여주면 친구들이 기뻐하는 반응을 보는 게 뿌듯했다.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공유했더니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외주 작업도 들어오게 되었다고. 기환의 그림의 매력을 발견한 외국에서 큰 프로젝트가 제안을 받은 뒤로, 그 일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도구, 포스카 마카

일러스트레이션 채색 도구로는 ‘포스카 마카’를 주로 사용한다. 겉에 색깔별로 이름이 적혀있어서 조색이 어려운 기환에게는 유용하다. 음식을 그려달란 제안이 왔을 때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땐 항상 친구한테 ‘이 색깔이 맞는지’, ‘맛있어 보이는 색깔인지’ 물어봐야 하는 게 색약으로서 핸디캡이긴 하지만, 이 마카로는 정직하게 원하는 색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림을 칙칙하게 그린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원색의 마카를 쓸 때만큼은 속이 시원해요.” 스케치만 하던 때, 친누나의 추천으로 사용하게 된 뒤로 채색이 한결 간결해지고 그림 그리기가 더욱 재밌어졌다고. 취미로 일러스트를 시작하고 싶은 이들한테 추천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여행지, 오키나와

기환이 꼽은 인생 여행지는 일본의 오키나와다. “바다와 바다 수영을 좋아해서 매년 가고 싶을 정도예요.” 날씨가 따뜻하고, 바닷물이 맑고, 수영할 수 있는 곳이 많고, 주민들이 느긋하다. 관광지이면서 도시이지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오키나와만의 느낌을 좋아한다. 여행 가서도 잘 안 돌아다니는 스타일인 그는 마치 현지인처럼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지내는 기분을 즐긴다. 직접 관찰한 여행의 순간을 12장의 그림 달력으로 만들어 달력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이사를 통해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굿즈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올해는 굿즈 대신 전시를 하고 일러스트 북을 제작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임기환 일러스트레이터

@kiihwanlim

Big Issue Korea Vol. 327

글: 정규환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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