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재희에게

2024년 11월 11일

게이와 여사친의 우정에 대하여

최근 게이와 여자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봤다. 영화를 보고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가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도시의 사랑법> 봤어? 우리 대학교 때 생각난다”라며 안부를 물었다. 대학 졸업 뒤 고향에 내려가 취직하고,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대뜸 “너에게 게이친구란 어떤 의미였어?”라고 물었다. “뭐랄까,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변하지 않는 친구?”라는 영화 대사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아무래도 비슷한 인생을 사는 동성 친구들하고는 언젠가부터 대화 주제로 시댁, 육아 이야기를 하게 돼. 그런데 게이 친구랑 있을 때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더라. 그런 게 좋아”라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의 예비 남편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도 ‘게이 친구 이해 가능 여부’가 교재 결정의 중요 요인이라고 했다. 그와 사귀자마자 게이 친구인 나의 존재를 알렸고, 신혼집으로 초대해 서로를 인사시키기도 했다.

게이-여사친이라 가능한 추억

우리 우정이 가장 빛을 발했던 건 지난 2014년, 함께 배낭여행 갔을 때였다. 목적지는 여행이 쉽지 않은 곳 중 하나로 꼽히는 나라 ‘인도’였다. 우리는 석 달이 넘는 시간을 함께 꼭 붙어 다녔다. 같은 방을 쓰며 절약한 돈으로 맥주를 한 잔 더 마셨고, 어색함이나 불편함 따위 없이 오롯이 여행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서로를 이성적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각자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터놓으면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었고, 내가 원하는 건 좋은 풍경을 잘 담은 사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이와 여성이라는 우리의 조합은 서로의 선을 지키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녀가 서울을 떠난 뒤, 나는 버릇처럼 ‘서울이 그립지 않냐’라고 물어봤다. 대도시를 떠나서 사는 삶이 정말로 행복한지 궁금했다. 가수 이효리가 제주도에 살던 시절,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스갯소리로 한 “나 서울 가고 싶어”라는 반응을 기대했지만 왜인 걸,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서울에 살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라고 단칼에 말했다.

사실 그런 질문을 했던 이유는 내가 이 도시를 벗어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게이는 꼭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자조적으로 모두가 이야기했던, 그 이유는 대도시에선 우리 같은 사람이 잘 숨을 수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도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는 2019년 출간된 박상영 작가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 중 단편 ‘재희’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여자 주인공 ‘재희’는 이른바 ‘잘 노는 여자’다. 남들의 시선은 잘 신경 쓰지 않으며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다.

한편, 게이 ‘흥수’는 남자들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싸’를 자처한다. 어느 날, 이태원에서 남자와 키스하는 모습이 재희에게 발각되고, 아우팅 걱정과 달리 서로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둘은 점점 더 가까운 친구가 된다. 그 이후 현실적인 계기로 재희의 자췻집에서 둘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원작 소설에 비해 많은 부분이 각색됐다.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두 주인공의 삶을 균형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설이 흥수의 관점이었다면, 영화는 두 주인공의 스무 살부터 30대 초반까지의 10여 년 동안의 사건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재희가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헤프다는 이유로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한다거나, 취직 후 회사에서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불합리한 경험이 추가됐다. 다행히 재희는 세상과 부딪힐 때마다 굴하지 않는다.

영화는 또 틈틈이 소설을 쓰며 작가의 꿈을 꾸는 흥수의 성장 이야기에 집중한다. 엄마에게 커밍아웃하는 에피소드와 아우팅을 걱정하는 자신과 달리 게이 성정체성을 빨리 받아들인 남자친구와 연애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20대의 여자와 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두 사람의 연대에도 설득력이 생기고, 관객들에게는 몰입을 선사한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치기 어린 청춘이라는 점 이외에도, 사회에서 소수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잔인한 대도시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아마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재희가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도, 의도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임신중절 수술을 결정할 때도 그 옆을 지키는 건 다름 아닌 흥수였다.

흥수도 마찬가지다. 엄마에게 커밍아웃하고, 입대하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이 마주하는 모든 시련에 두 사람은 기꺼이 곁을 내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우정은 완성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두 아웃사이더의 서사로 여성영화와 퀴어영화의 문법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마케팅은 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대도시, 즉 ‘서울’이다. 이태원의 게이클럽, 대학가 앞의 허름한 빨간 벽돌의 다세대 자췻집 등 화려한 대도시 이면의 풍경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이들의 이야기 뒤에 있다. 공간적 배경과 주인공들의 감정선 모두 화려함과 쓸쓸함이 반복적으로 대비되면서 대도시의 삶이란 마치 클럽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처럼 손에 잡힐 듯하지만, 녹록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주연을 맡은 김고운, 노상현 배우의 연기 모두 인상적이지만 특히 노상현 배우는 억지로 ‘게이’스러운 연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고유한 흥수라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옥에 티는 ‘마케팅’이다. 상업 퀴어영화로서 훌륭한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 이전 예고편이나 포스터 등에서 퀴어의 흔적을 애써 지우려는 노력은 원작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재희는 영화에서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돼”라고 흥수에게 이야기했지만, 영화 밖에서는 약점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게 했다. 이는 퀴어 콘텐츠를 퀴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차별이라는 걸 모르는 이 시대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퀴어영화라는 건 결코 약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보통의 상업영화의 흥행 패턴과 달리, 영화의 진가를 알아본 관객들의 입소문이 이 영화의 꾸준한 흥행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을 기대했든 간에 몰입을 방해하는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메시지는 관객들에게 제대로 통한 듯하다. 함께 영화를 본 여자인 친구에게 “(영화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았어?”라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우리가 주인공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뿌듯했어”였다.

영화가 주는 위로는 이런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재희와 흥수에게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라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소설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영화로도 스크린을 통해 마주할 수 있는 건, 대도시에서 새로운 사랑법을 찾아온 이들이 만든 결과 아닐까.

[정규환의 다르게 보기]

오마이뉴스에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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