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기 좋은 날

2024년 09월 03일


장미꽃 열 송이를 샀다. 은은하게 핑크빛이 도는 도톰하고 우아한 영국 장미, “장미꽃 열 송이 부탁드릴게요. 오늘이 10주년이라서요.” 이미 하얀색 장미를 사기로 마음먹었지만 “빨간색은 너무 강렬하죠?”라고 재차 확인하듯 플로리스트에게 물었다. 은은한 게 좋지 뭐든… 그러고 보니 그는 오늘도 연한 핑크색 셔츠를 입고 나갔다. “누군진 몰라도 받는 사람이 참 좋아하겠어요.” 옆에 있던 손님이 쇼케이스 안에 아름드리 꽃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네, 오늘 프러포즈 하는 날이거든요.”라고 말하자 이내 어색하지만 로맨틱한 공기가 꽃집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나는 동네 꽃집의 축하를 받으며 문을 나섰다. 단골 카페에서 이따 두시에 보기로 했다. 남자가 꽃을 들고 대중교통을 타는 건 늘 부끄럽다(보는 건 좋다). 사랑에 빠졌다고 세상에 홍보하는 것 같다. 누구나 그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혼인신고를 결정하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떤 프러포즈가 좋을지’였다. 너무 과하지도 않으면서, 진심이 잘 전해지는…, 일단 집에서는 도무지 분위기가 잡히지 않았다. 편한 옷차림과, 반려견의 흔적들, 생활감이 묻어있어서 그 상태로 프러포즈라니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간직해온 프러포즈 장면을 떠올렸다. 동거 7년 차인 커플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제니퍼 애니스톤과 벤 애플렉이 연기하는, 생활연기가 아주 일품! 서로 사랑하지만 프러포즈 하지 않는 그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여자, 그녀는 결혼을 원하고 그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고 버팀목이 되지만,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늘 공허하다. 그렇게 둘은 떨어져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여자가 체념하고 지금처럼 같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기로 약속한다. 그 대신 농담으로 그에게 “너의 그 오래된 애착 카고 바지는 제발 버려달라”라고 부탁한다.

새출발을 앞두고 서로의 짐을 정리하고 있는 찰나, 남자가 또 그 카고 바지를 가져온 걸 발견한다. 그녀는 징글징글 하다는 하나는 말투로 ‘지금 바로 버리자’라고 이야기하고, 남자는 못 이긴 척 “버리기 전에 주머니 체크해 봐, 혹시 중요한 게 들어있을 지도 모르니.”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 안에서 반지 케이스 발견한다. 그것을 열어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하고 몇 초간 주마등이 스치듯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사이 뒤에는 무릎을 꿇은 그가 고백한다. “나랑 결혼해 줄래? 당신이 행복해야만, 나도 행복할 수 있어.”라고 청혼한다. 그녀의 대답은 역시나 “물론, 당연하지.”

내가 이런 프러포즈를 하고 싶은 건지, 받고 싶은 건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담백한 모습이 이상적인 고백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배우도 아니고, 영화처럼 완벽한 연출 스탭들이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 손으로 편지를 써야 한다. 편지엔 어떤 내용은 적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러브레터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기 전 딸에게 보낸 편지인데 ‘사랑은 빛, 사랑은 우리의 진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라는 것. 사랑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아직까지 과학이 공식적인 설명을 찾아내지 못한, 극도로 강력한 힘,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모두 사랑의 힘을 방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작지만 강력한 ‘사랑’의 엔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인슈타인도 아니고, 유명인의 말을 빌린다고 해서 진심이 꼭 잘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프러포즈는 대필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프러포즈는 그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눈물 흘리지만, 내가 따라 하려고 하면 어딘가 어설퍼지는 것. 사랑한다는 말 외에 다른 100가지 말을 하는 것. 백만 가지 상상을 하지만, 결국 진심 어린 눈빛으로 전달되는 것.

프러포즈 하는 날 아침엔 비가 왔다. 남쪽에서 태풍이 북상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강력한 더위 덕분에 태풍이 공기 중으로 소멸되어 비는 일찍 그쳤고, 그를 만나기로 한 오후 2시엔 해가 떴다. 무지개는 보지 못했지만 분명 어딘가에 누군가는 발견했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단골 카페의 자리는 한산했다. 늘 앉던 자리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 기다림이 좋아서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멘트

2 thoughts on "고백하기 좋은 날"

    재재

    아 너무 몽글몽글 설레요

    2024.9.3
    정재재

    아아아 빨리 다음편 보고 싶어요

    2024.9.3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관련된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