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시간들

2025년 02월 12일

1층에 사는 장점은 의외로 많습니다. 바쁜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일주일에 한번 분리수거를 할 때도 동선이 효율적이고, 평소에도 층간 소음 걱정 없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주문한 택배가 잘 도착했을지, 특히 복도형 아파트에 산다면 현관을 지나 코너를 짠하고 돌았을 때의 그 설렘이 있달까요. 그리고 밤새 눈이 많이 내린 날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무와 놀이터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풍경을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작은 것에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이고, 사는 층수나 건물의 형태, 그리고 생활하는 방식에 따라 느끼는 시간과 감정은 제각각인 것 같아요. 오늘은 방화동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1층을 고쳐서 살고 있는 성표의 집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오래된 아파트 1층으로 이사할 결정을 하게 됐나요?

집을 구할 때만큼은 감성적인 요소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날씨가 좋을 때 이 집을 보고 바로 매료되었어요. 가을쯤이었는데 집 앞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니까 오랜 시간이 쌓인 공간이 더욱 근사하게 보인 것 같아요. 창밖으로 계절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지금도 이 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아파트를 고쳐서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느낀 점이 궁금해요.

집이 워낙 오래되어서 수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인테리어를 새로 했지만 만약 살기에 적당한 컨디션의 집이었다면 최소한의 공사만 했을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새로 만든 공간도 물론 멋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집이 더 끌리는 것 같아요. 자기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오래된 것과 새것을 조화롭게 꾸미면 얼마든지 새집보다 살기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독립하고 나와 어울리는 공간을 갖는 게 로망이잖아요. 이 집은 개인적으로 평소에 저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인테리어할 때 어떤 느낌을 추구했어요?

저는 사실 무취향의 인간이거든요.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도 제 취향을 반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지 집이 넓어 보이게끔 정말 하얗게만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공간을 채우는 가구나 소품의 배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얀색 부엌 타일을 계속 보다 보니까 심심한 거예요. 그래서 나무 선반을 새로 달았는데, 그제야 제가 좋아하는 주방의 모습이 완성되더라고요. 그렇게 조금씩 제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1인 가구로서 지금처럼 사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굉장히 이상적이잖아요. 정돈된 1인분의 일상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나한테 딱 맞는 작은 집에서 절제하며 사는 재미가 있을 것 같거든요.

맞아요. 작은 집에 살면 거기에 맞춰서 살게 돼요. 일단 물건을 사더라도 크기나 수납을 잘 고려하고 사야 돼요. 예를 들어, 이 집엔 베란다가 없다 보니까 빨래 건조대도 문 뒤에 세울만한 사이즈로 사야 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선풍기를 사야 해요. 소비에 신중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만족감을 클 때도 있어요. 마음이 설레게 하는 물건이 아니면 최대한 안 사려고 노력하지만 은근히 물건 욕심이 많아서 고민이랍니다.

집 인테리어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오는 집 같아요.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우드톤에 북유럽과 일본의 차분한 감성이 잘 섞인 것 같아요. 주방에 귀여운 프라이팬이 걸려 있는 것만 봐도 살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요.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이 테이블과 체어가 굉장히 담백하고 보기가 좋았어요. 영화 <카모메 식당>이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잔상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영화의 전체적인 스타일이 제가 추구하는 인테리어와 잘 맞아요. 특히 주방 같은 경우도 깔끔하게 정리된 것보다는 그릇이나 커피 도구들로 생활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걸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성표도 평소에 영화의 주인공처럼 요리도 하고, 커피도 직접 내려먹는 걸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살림을 잘 하실 것 같은데 살림 중에서 무엇을 제일 좋아해요?

청소를 가장 좋아해요. 그릇이나 공간이 깨끗해지는 걸 보면 기분 좋아져요. 무엇보다 청소를 하다 보면 잡생각이나 고민이 사라져요. 우울한 감정에 잠식되지 않게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삶을 대하는 태도를 거창하고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매일 설거지나 청소를 하듯, 내가 해야 될 일을 부지런하게 정리하고, 내 주변 환경을 관리하는 게 곧 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럼, 사람마다 사는 모양은 저마다 다양하지만, 오롯이 혼자서 인간이 도시에서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뭐라고 느껴요?

혼자 살다 보면 집 안에서 누군가와 교류나 상호작용이 사라지잖아요. 그럴수록 나에 대해서 돌아보고 조금 더 보살펴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상에서 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고, 내 크고 작은 문제점을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집 밖에서도 누군가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는 게 우선인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면 이 집이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나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나한테 주어진 환경을 단정하게 가꾸는 게 스스로를 돌보는 행동이니까요. 사실 저는 제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 할 때가 있거든요. 스스로 돌봄은 잘 못하지만, 제 집을 돌보는 건 상대적으로 잘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이 집에 살면서 스스로도 더 예뻐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매일 정돈된 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심되겠네요. 이 집에서 생활하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은 뭐가 있어요?

아끼는 머그컵을 볼 때 기분이 좋아요. 직업이 프로그래머다 보니 주로 집에서 일을 많이 하는 편인데, 보통 드립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거든요. 그날의 기분에 맞게 좋아하는 컵을 고르는 게 저의 작은 루틴이에요. 반복되는 매일이지만 머그컵 고르기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에요. 새해를 맞이해서 세운 계획이 있나요?

운전면허를 따보려고요. 지금까지 운전 안 하고 잘 살다가 운전을 하고 싶다고 느낀 이유는 점점 더 혼자 살아가는 상황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혼자라도 모든 걸 다 해내야 한다는,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올 때 아무렇지 않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야 되는데 운전도 그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운전을 할 필요성을 많이 못 느꼈지만, 언젠가는 운전도 하고, 차도 구입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성표

Big Issue Korea Vol. 332

글: 정규환

사진: 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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