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공기처럼

2026년 04월 30일

새 물건이 가진 가치는 어디까지나 그것의 쓰임이나 목적이 유한할 때 결정되는 것이고, 반대로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는 가치는, 어떤 물건이 지닌 순수함과 관련된 것이라고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실용성이나 아름다움 같은 고유성, 혹은 그 안에 담긴 추억이나 이야기 같은 것들이겠지요.

간혹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은 슬픔이 묻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 만들어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런 시간의 층위를 지닌 것들이 얼마나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돼요. 마음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며 간직해 온 어떤 마음들은 예술이라는 모양을 입기 전, 우리 안에서 오래 머물다가 어느 날 불쑥 낯선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사람이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게 되는 때가 온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런 삶의 다채로운 은유들만으로도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느끼게 된 사람. 북촌에서 <물과 공기>라는 편집숍을 운영하고 있는 허유님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집’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어요. 보통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휴식을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되는데, 허유님의 집은 작업실의 요소도 함께 있는 것 같아서요.

뭐랄까, 집은 가장 느리게 움직여도 되는 곳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컷 슬퍼해도 되는 곳이기도 하고요. 바깥에서는, 예를 들어 일하는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집에서는 굳이 웃을 일도 없고, 그렇다고 일부러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고요. 실제로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 날도 있거든요. 그럴 때 마음 놓고 다운될 수 있는 곳, 아주 천천히 움직여도 되는 곳. 저에게 집은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실에서 은행나무가 보이네요. 계절마다 거리 풍경이 달라질 것 같아요. 특히 노랗게 단풍이 지는 가을에는 더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맞아요. 사실 처음에 이 집을 선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은행나무였어요. 집이 부암동 서향 산자락에 있다 보니 전반적으로 어두운 편이거든요. 그런데 창밖에 은행나무가 크게 보이는 그 풍경이 너무 좋더라고요. 저는 높은 층에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1층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도로가 가까워서 조금 시끄러운 단점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풍경이 너무 좋아서 이 집을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집 안의 소품들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멋스럽고 빈티지한 느낌이 있어요. 이런 공간을 만들어가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일이잖아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건 아닐 텐데, 어떤 방식으로 이 공간을 유지해 오셨는지 궁금해요.

지금 운영하는 <물과 공기>는 아직 1년이 채 안 됐지만, 그 전에 <LAMB>이라는 공간을 14년 정도 운영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물건을 셀렉하는 게 제 일이기도 하고, 또 좋아하는 일이기도 해요. 예쁜 물건을 고르고, 거기에 제 취향을 반영해 배치하는 과정 자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방식이죠. 패션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거든요. 그 사람이 입은 티셔츠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말해 준다고 생각해요. 공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 집엔 부모님이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오래된 물건도 있고, 당근마켓에서 산 것도 있고, 마음먹고 꽤 비싸게 산 의자도 있고요. 그런 서로 다른 출처의 물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의외로 집에 물건이 아주 많아 보이진 않아요.

물건을 많이 모아두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이실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도 짐이 조금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소파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전반적으로 텅 빈 공간을 좋아해요. 예를 들어 침실 같은 경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마음이 편해요. 하지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건 옷장이에요. 저에게는 옷장이 가장 에센셜한 물건이거든요. 아무래도 옷을 좋아하다 보니, 그 옷들을 보관하는 공간이 중요해요. 

세상에는 ‘유행’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게 있고, 반대로 유행과는 별개로 그냥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만들어내는 방식도 있는 것 같아요. 허유 님은 후자에 더 가까운 분처럼 느껴지는데요. 편집숍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가 궁금해요.

처음 시작한 건 북촌에 <LAMB>이라는 공간이었는데, 2002년 일이에요. 처음부터 ‘편집 매장’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작은 가게를 낸 거였죠. 제가 만든 옷도 있었고, 제가 사 온 옷도 있었고, 또 다른 기물들도 섞여 있는 공간이었어요. 사실 장사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른다고 느끼는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장사를 했죠. 실제로는 계속 밑지고 있었는데, 밑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스물여덟 살이었고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가게의 어떤 분위기를 좋아해 주셨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LAMB>에서 소개하는 의류 브랜드가 50개 정도까지 늘어났어요. 대부분 로컬 디자이너 브랜드였고요. 지금은 편집숍이 굉장히 많고 다들 익숙하지만, 그때만 해도 로컬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취향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어 오신 걸 보면, 그 취향 자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도 궁금해지네요.

예를 들면 어릴 때 엄마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것들, 서랍을 열면 들어 있던 자질구레한 물건의 기억이요. 저는 어릴 때 옷장 안에 숨어 노는 걸 좋아했는데, 그때 맡았던 옷장 속 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엄마 향수가 배어 있는 생활의 냄새 같은 것들요. 약간 아늑하면서도, 조금 먼지가 섞여 있는 듯한 복합적인 냄새가 있었거든요. 그런 감각적인 경험들 속에서 취향이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운 좋게도 어릴 때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기회가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아마 그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6년 정도 있었는데, 워낙 20대 초중반까지 머물렀던 시기라서요. 그때는 정말 스펀지처럼 많은 걸 흡수하던 시기였거든요.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곳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탈리아라는 나라 자체가 굉장히 고색창연한 곳이잖아요. 어디를 가도 문화적 유산이 자연스럽게 쌓여 있는 곳이고요. 사실 저는 학교생활을 굉장히 제멋대로 했어요. 듣고 싶은 수업만 듣고, 듣기 싫은 건 안 듣고…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엉망이었죠. 그런데 그때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유야, 제발 학교에는 좀 나와. 수업 안 들어가도 괜찮아. 그냥 와서 앉아 있어. 친구들이랑 떠들면서도 배우는 게 많아.”라는 그 말이 정말 정확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에 제가 본 거리의 풍경, 건물들, 친구들 집에 있던 물건들, 그들이 입던 옷, 또 그들이 관심을 두던 건축가, 제품 디자이너, 연예인까지… 그런 것들을 정말 스펀지처럼 흡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취향이라는 게 꼭 유학의 여부를 떠나, 결국은 얼마나 느끼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집 안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특별히 추억이나 사연이 담긴 것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LAMB>을 운영할 때 사용하던 쇼핑백이에요. 제가 컴퓨터를 잘 못해서, 이 디자인도 전부 손으로 먼저 만들었어요. 그걸 그래픽 디자이너인 친구에게 전달해서 인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중요한 건 콜라주 이미지가 안쪽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아이디어였어요. 보통은 이런 그래픽이 쇼핑백 바깥쪽에 크게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바깥에는 작은 단서처럼만 두고, 안쪽에 훨씬 더 크게, 그러니까 매시브하게 이미지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바깥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는데, 안쪽에 콜라주가 크게 들어가 있는 게 인상적이네요. 가게를 운영하시던 시절의 장면들이 많이 떠오르실 것 같아요. 

그러다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백인 여성 여행자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안을 슬쩍 들여다보더라고요. 들어가도 되나 망설이는 것 같아서, 지금은 특별히 전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으니 원하시면 들어와서 구경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같이 차 한 잔을 같이 마셨어요. 그러다 문득 뭔가 하나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별건 아니지만 쇼핑백에 물건 하나를 넣어서 “웰컴 투 코리아”라고 하면서 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우시는 거예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너무 이상할 정도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셔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좀 당황하셨겠어요. 그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얼마 전 남편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상실감이 너무 커서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우연히 한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해서 오게 됐다고요. 그런데 돌아가신 남편의 성이 ‘램(Lamb)’이었던 거예요. 제가 드린 쇼핑백에 LAMB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마치 남편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생각해 보면 그분은 한국에 특별한 관심도 없이 그냥 여행지를 정해 왔고, 또 서울이라는 넓은 도시 안에서 수많은 가게 중에 하필 그곳에 들어왔고, 심지어 그날은 정식 영업일도 아니었는데 제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죠. 그런 걸 보면, 삶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변수들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언제부터 시작된 인연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삶과 인연이 참 신기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그런 일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정말로 ‘우연’인 일은 별로 없다고 느끼거든요. 그 일은 제게도 굉장히 결정적인 경험 중 하나였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그분께 그저 쇼핑백 하나를 드렸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그 물건 하나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속에 있던 그분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작은 쇼핑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가치 있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경험이 저에게는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물건이나 사람, 여러 존재들이 모두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지네요. 끝으로,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이야기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이‘는 원래 길고양이였어요. 제가 북촌 계동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그 근처에 ‘석정보름우물’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거기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요. 양반집 도련님과 신분이 다른 여성이 사랑에 빠졌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 비극적으로 그 우물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예요. 또, 그 근처에는 가회동성당이 있는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절과 관련된 장소들이 남아 있거든요. 성지 순례를 온 사람들이 그 우물 앞에 서서 설명을 듣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제가 정이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그 우물 근처였어요. 그래서 이름을 ‘우물 정’ 자를 써서 정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허유

Big Issue Korea Vol. 345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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