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남편이 되는 동안

2026년 11월 02일

이달 말 결혼식을 앞두고, 축의대를 맡아주기로 한 종길이 하객 명단을 달라고 했다. 누가 누군지는 알아야 봉투도 받고 안내도 할 거 아니냐고. 사무실에서 하객들 이름을 하나씩 훑어보다가, 친척 이름에 이르자 불현듯 예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친척들도 와?” 종길이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언젠가 형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여의도에 있는 오피스 건물에 자리한 한 바였다. 내 고향 영등포. 그 밤 여의도의 골목에는 낮의 활기나 한강의 푸른 풍경과는 다른 기운이 있었다. 금융계의 욕망과 직선으로 선 아파트들 이면에 깔린 그림자 같은 것. 나를 이끄는 형의 눈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저 그런 데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군대에서 선임 손에 이끌려 동정을 잃었다는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처럼,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날 밤은 그럴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그러니까, 예비 신랑(예랑)이 아직 남자친구였던 시절이다. 그날 낮에는 오랜만에 가족 모임이 있었다.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으로 한동안 멀게 지내다 다시 얼굴을 보기 시작한 무렵이었는데,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 다른 형이 새로 음식점을 열었고,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음식을 먹었던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러고는 84제곱미터 아파트 거실에 둘러앉아, 각 집안의 어머니들과 딸이 사과를 아주 예쁘게 깎아 나눠 먹었다. 성인 중에 가장 어렸던 나는 그날따라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낮술을 기분 좋게 엄청 들이 부었다. 제대로 된 직장도 비전도 없던 20대 후반의 나에게 그날은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몰려온 하루였다. 살면서 꿈꿨지만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불안함 사이에서 어딘가로 숨거나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외가는 엄마를 포함한 4남매가 있는데, 세 외삼촌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든든했고, 실제로 사이도 늘 좋았다. 사촌 형과 누나들도 모두 사이가 좋았고, 집집마다 아이가 두셋씩 있었고, 그들은 모두 사는 집의 환경도 인생의 방향도 비슷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집만 튀었다. 모두 돌림자를 쓰는 형들 사이에서 나는 성도 이름 끝 자도 다른 막내 사촌이었다. 그런, 이방인 같은 감정은 가부장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심리적으로 가까웠고, 그만큼 외가 식구들과 사촌들도 가깝게 느꼈다.

90년대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어른들은 에서 가게에서 자정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우리 사촌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노래방으로 보내졌다. 어른들이 노래방비를 쥐여주며 너희끼리 놀다 오라고 했다. 형들은 마이크를 돌려가며 목청껏 H.O.T.나 젝스키스의 노래를 불렀고, 막내인 나는 대체로 탬버린을 들고 앉아 있었다. 어른들 눈을 피해 우리끼리 노는 것. 그게 사촌들 사이의 오래된 놀이였다. 그날 밤 나를 여의도로 데려간 것도 그 형들 중 하나였다.

바의 여자 직원은 나와 얼추 또래로 보였다. 학비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런 데서 알바하는 거겠지. 그녀는 쉴 새 없이 술을 따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칵테일 한잔으로도 눈치 보이지 않는 종로의 어느 바와는 바른 분위기. 그때는 마침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신드롬이 전국을 휩쓸던 때라,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다. 첫 대화 주제로 천만 영화만 한 게 없으니까. 그녀가 상냥하게 물었다. “영화 보셨어요?”, “네, 물론 봤어요.” 내게는 그 영화가 영화 이상이었기에, 이 주제가 쉬이 휘발되는 게 싫어서 계속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이 영화가 왜 좋았어요?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였다는 것도, 에이즈로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영화를 보셨다면 당연히 아셨겠죠. 그의 절규 같은 노래를 들으면, 죽어가면서도 이 세상에 뭘 남기고 싶었는지 느껴지나요? 너무 웃기지 않아요? 이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게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이렇게나 많이 본다는 게. 그러고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요. 차마 여기까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사이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형은 옆에서 술잔만 비웠다.

취기가 올랐는지, 그 바의 술이 강렬했던 탓인지, 나는 바자리에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족 모임,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낮에 거실에서 깎아 먹던 사과, 돌림자 사이에 끼어 있던 내 이름, ‘남자들끼리’라는 말, 그리고 정작 내 속 이야기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남의 이야기만 붙들고 있는 나.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그 모든 게 싫어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주려고 이곳에 데려온 형이 당황했다. 형에게 그 밤은 어린 시절 노래방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어른들 눈을 피해, 남자들끼리, 적당히 대화하고 기분이나 풀라고. 그게 우리만의 놀이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나는 형과 나의 우정이 그런 식은 아니길 바랐다.

형은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나왔다. 여의도의 아파트 주차장, 등나무 아래에서 형이 나를 다그쳤다. 울지 말고 말하라고.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하라고. 형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뺨을 맞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리쳤던 건 기억난다. 그만 울고 말하라고. 그날 나는 끝내 말을 잃는 사람처럼, 아니 할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7~8년 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형에게 전화로 커밍아웃을 했다.

“형, 저 결혼해요. 남자랑.”

“알고 있었어. 유튜브에서 봤거든.”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축하해. 네가 멋지다고 생각해.”

“정말요?”

“남들이 주저하는 길에 먼저 가는 거잖아.”

“이제 그날 제가 왜 울었는지 알겠어요? 그때 형이 울지 말고 말하라고 했잖아요. 근데 저는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어요. 살다 보면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요.”

나는 종길에게 명단을 마저 보여줬다. 작은 아버지, 사촌 동생, 형 누나들. 내 이야기를 듣던 종길이 한 이름 옆에 작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 사람은 꼭 잘 안내해줘. 종길은 뭐라고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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