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절로 가는 계단

2025년 11월 20일

책과 두부,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몇 가지 닮은 점이 있어요. 보통 내용물이 하얗고, 네모나게 각져 있으며, 한 판에 같은 모양으로 뚝딱 찍어낸다는 점이 그렇죠. 처음엔 무슨 이야기인가 싶지만, 종길이 언젠가 두부집 사장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면 조금 이해가 돼요. 어쩌면 1인 출판사 ‘시절’을 운영하며 책을 만드는 그의 모습이 이미 두부 장수와 닮아 있는 것 같아요. 두부처럼 무해하고, 부드럽고, 온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바로 그런 책말이죠. 오늘은 용산구 후암동에서 해방촌으로 이어지는 계단 근처, 종길이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가 그의 하루와 집, 그리고 계단 위로 스며드는 호시절을 살짝 들여다보려 합니다.


해방촌에 놀러올 때마다 이 계단과 길을 자주 걸었는데, 바로 옆에 종길의 집이 있는지 몰랐어. 이 집에 산 지도 어느덧 3년이 됐다고 들었는데, 이 집을 소개해 줘.

우리 집을 소개하자면, 우선 특별한 컨셉이나 거창한 인테리어는 없어. 흔히 말하는 ‘미드 센츄리 모던’이라든가, 요즘 많이들 하는 유행하는 스타일이 있는 집은 아니거든. 그냥 보면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야. 그냥 편하게 느껴졌으면 좋겠어. 소파도 사실 침대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산 건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친구들이 좀 부담 없이 와서 자고 갈 수 있었으면 해서였어. 그냥 갑자기 연락 와서 놀러 오기도 하고, 머물다 가기도 하고, 그런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인테리어를 멋지게 해놓은 집이나 카페 같은 데 가면 있잖아, 괜히 내가 여기서 막 널브러져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근데 우리 집은 그런 느낌은 전혀 없어. 오히려 좀 부담 없이 와서, 그냥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 그런 집이라고 소개할 수 있지.

네 취향이나 인테리어가 별로 없다고 했는데, 근데 내 눈엔 예쁜 것들이 많아 보여. 책이랑 소품이 집이랑 잘 어울려서 그런가 봐. 이 귀여운 집은 어떻게 구하게 된거야?

내가 서울 산 지가 이제 10년이 좀 넘었더라고. 거의 2년마다 계속 이사를 다녔어. 광진구에 살다가 성동구로 갔다가, 은평구 갔다가, 성북구 갔다가 그러다 지금은 용산구로 오게 된 거야. 늘 어떤 상황에 맞춰서 집을 옮겨 다녔던 거지. 다니는 직장이랑 가까운 곳이라든가, 같이 살기로 한 친구랑 타협해서 고른 동네라든가. 여기도 사실 내가 이사하던 즈음에, 내가 일하던 책방이 이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됐거든. 나도 ‘그럼 이 동네를 한번 알아볼까?’ 하던 차에 이 집을 본 거지. 그리고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여기 살면 되겠다’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었어.

네가 일하는 서점이 이 계단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 최고의 직주근접 환경이네. 근데 내게 집에 대해서는 딱히 할 얘기가 없다고 했으면서, 네 수필에는 은근히 집이나 동네 이야기가 많더라. 은근한 애정이 느껴지던데, 이 동네가 왜 좋아?

사실 집 근처에 특별히 편의시설이 많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 오히려 없는 게 많지. 지하철역도 멀고, 불편한 점도 많아. 그런데도 이 동네가 좋은 이유는, 그냥 정이 붙어서야. 예를 들면 내가 책방 일을 마치고 밤 늦게, 보통 12시 넘어서 집에 오거든. 그럼 힘도 없고 배도 고프고 해서 편의점에 들러. 근데 그 편의점 사장님이랑 이제 친해져서, 가끔 스몰토크를 하는 거야. 오늘 뭐 했냐, 날씨 더운데 땀 흘리면서 왜 걸어왔냐, 뭐 그런 얘기들. 짧은 대화인데, 그거 나누고 집에 들어오면 그냥 하루가 잘 마무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누군가랑 대화 잘 안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동네 주민’이 생겼다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게 되게 따뜻해. 이맘때쯤이면 능소화가 곧 피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이 동네가 좋아지는 것 같아.

일도, 생활도 이 동네라는 울타리 안에서 너만의 단순함을 만든 거잖아. 일, 생활, 창작이 한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대단하게 느껴져. 그리고 특히 거실이 인상적이었어. 들어올 때 복도가 아니라 도서관 서재처럼 느껴졌거든.

맞아. 거실을 서재처럼 바꾼 데는 이유가 있었어. 어디서 봤더라? 아, 유튜브였는데, 책 관련 일을 하시는 분이었나 봐. 그분 집을 소개하는 걸 보는데,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아예 가구를 다 짜서 책으로 벽을 막아놨더라고. 미로처럼 책을 지나서 거실로 들어가는 거야. 그게 너무 예뻐 보였어.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집에 들어오면 그냥 식탁이 있거나, 넓은 거실이 나오거나. 근데 나도 ‘들어오자마자 책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바꾼 거지. 또 마침 그때 사무실을 따로 구하면서, 집에 컴퓨터를 둘 필요가 없어졌거든. 그러니까 거실에는 굳이 책상을 두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고, 그래서 책들을 전부 거실로 빼온 거야.

매일 나갔다 들어올 때 책들 보면 뿌듯하겠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용 안 봐도 그냥 책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잖아. 근데 서점에서 일하니까, 집도 서점처럼 꾸미거나 정리하게 되지 않아?

맞아,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안 그러려고 계속 노력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 그렇다고 서점을 안 좋아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나는 책방 가는 걸 여전히 좋아해. 재밌는 경험이 하나 있는데, 내가 일하는 책방을 손님으로 가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거야. 쉬는 날에 동네 지나다가 동료 직원한테 인사나 하려고 들어가면, 책방이 너무 예뻐 보이는 거야. 조명도 그렇고, 늘 켜두는 인센스 향도 확 나고. 내가 근무할 때는 내가 직접 향을 켜면서도 전혀 못 느끼거든. 근데 손님으로 들어가면 향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평소엔 별 관심 없던 책도 괜히 읽고 싶어져. 내 일터인데도, 일하러 오는 게 아니라 그냥 들르는 순간에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거지. 그게 되게 신기했어.

그래서 내 눈에 이 집이 독립서점처럼 예뻐보이나봐. 독립서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 유행하는 말로 ‘누가 그걸 모를까’싶은 뻔한 질문을 듣잖아. 운영이 어렵다거나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여전히 낭만을 얘기하고 싶긴 해. 독립서점에서 일하고, 또 작가로 활동하면서 1인 출판사도 운영해보니 어때?

내가 출판사 ‘시절’을 시작한 건, 다른 작가들의 글을 가지고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어. 처음엔 출판 등록을 일부러 안 했거든. 굳이 할 필요가 없었지. 교보문고나 알라딘 같은 대형 서점에 유통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내가 거래하는 책방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출판사를 내게 된 진짜 이유는, 글을 잘 쓰는데 빛을 못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저 사람 진짜 글 잘 쓰는데’ 혹은 ‘글을 쓰진 않지만,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되게 좋은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거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꺼내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지. 내 글만 책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서.

그래서인지 네 책들도, 이 집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더라. 너랑 많이 닮은 것 같아. 오늘 처음 종길의 집에 놀러와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이 시절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호시절’이야. 우리도 30년 넘게 살면서 많은 시간들을 지나왔잖아. 너무 부끄러운 때도 있었고, 진짜 암울하고 힘들었던 나도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다 그 ‘시절’이었어. 그래서 지금도 훗날 나에게는 호시절로 기억될 것 같아.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고. 매일매일이 호시절인 거지. 기억나, 우리 처음 같이 밥 먹었던 날? 가게 이름이 ‘호호’였거든. 그 벽에 ‘좋을 호’ 한자가 나란히 적혀 있는 게 너무 예뻐서 사진 찍었던 기억도 나. 그때부터 다 호호였잖아.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감동이다. 그런데 너는 집 앞 계단을 매일 오르락내리락 해?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타? 걸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해?

보통 걸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보면, 계단 옆에 화분이 있어. 봄이 되면 동네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어르신들이 제철 꽃들을 심어놓거든. 그래서 걸으면서 “아, 지금 이 꽃이 철이구나, 진짜 봄이구나” 이렇게 구경하면서 걷는 거야. 능소화가 막 만발하면 ‘여름이구나’이런 생각도 들고. 다른 생각은 잘 안 하고, 그냥 그게 좋아. 계단 다 올라오면 여기가 지대가 좀 높아서, 주변도 내다보이고, 특히 요즘엔 노을이 참 예쁘거든. 그때 보면 ‘이 계절이 아름답다’ 이런 생각 많이 해. 진짜 세상에 아름다운 게 참 많구나 싶고. 참고로, 이 계단이 총 108개야. 처음 살 때 거의 매번 세 봤어. 딱 108개라서 신기했지.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108배 하듯 인생을 살아가라는 느낌도 들고. 일부러 108개를 맞춘 거면, 불교적 의미 같은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구나, 내려갈 때 나도 한번 세어봐야 겠다.

오종길

Big Issue Korea Vol. 340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코멘트

0 thoughts on "호시절로 가는 계단"

    아직 코멘트가 없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관련된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