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와 나

2026년 02월 28일

한국에서 사는 장점 중 하나는 새해를 세 번 맞이할 수 있다는 거예요. 1월 1일이 한 번 있고, 설날 그리고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오면 비로소 한 해가 제대로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그때까지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눌 수 있고, 그 사이의 시간은 어딘가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요즘 가장 마음에 멤도는 단어는 ‘회복’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기보다는 다시 일상 쪽으로 천천히 가까워지는 감각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한자는 다르지만, 회복도 어쩌면 복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해 봐요. 무언가를 상실하고도 다시 살아가게 되는 힘 같은 거요.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밴드 선셋 롤러코스터의 노래 〈My Jinji〉에서 이름을 따온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친구 종훈의 소식이 문득 궁금해졌어요. 서울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계신 파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요즘 어떤 리듬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거든요. 오늘은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종훈의 집에 가봤습니다.


서울에 독립해서 오래 살다가 파주로 이사한 계기가 궁금해.

서울에서 동네를 옮겨 다니며 몇 번의 직장을 거치다 보니, 어느 순간 완전히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됐어. 잠깐 쉬어도 나아질 것 같지 않던 때, 부모님이 파주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갑자기 사람이 필요해졌고, 문득 파주 출판도시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생각하는 ‘예쁜’ 파주가 사실 여기였거든. 

막연한 상상 말고, 실제로 살아보니까 파주는 그리던 이미지랑 얼마나 닮아 있었어?

파주는 되게 묘한 도시야. 말 그대로 시골 같은 동네도 있고, 또 어떤 데는 인사동 쌈지길 같은 감성이 남아 있는 곳도 있고. 헤이리 마을이나 프로방스 마을 쪽은 이국적인 느낌이 좀 있잖아. 반대로 야당역 쪽은 사람도 많고 신도시처럼 깔끔한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데는 별로 살고 싶지가 않더라. 파주는 동네마다 괴리감이 되게 큰 도시야. 그래서 더 고민했어. 어디에 정을 붙이고, 어디를 생활 반경으로 삼고 살 수 있을지.

그래도 인스타그램으로 봤을 때 이 집, 네가 꽤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았어. 건물 외관이나 내부가 건축적으로 꽤 깔끔해 보이더라. 이 동네만의 단정한 분위기도 느껴지고.

응, 맞아. 사실 들어오는 복도부터 마음에 들었어. 공간 자체가 주는 차분한 느낌이 있어. 출판사와 디자인 스쿨을 옆에 두고 산다는 감각이, 기분이 묘하게 좋기도 해. 그리고 내가 겨울에 이사왔잖아. 그래서 봄이나 여름은 아직 못 느껴봤어. 주변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거든. 날씨 풀리면 도보로 움직이는 동선이 훨씬 많아질 것 같아. 걸어 다니면 괜히 여기저기 더 돌아다니게 되고. 그래서 봄, 여름의 이 동네가 좀 기대돼.

동네가 바뀌면 생활 리듬이나 마음가짐도 같이 달라지잖아. 청파동이랑 화양동에서 살 때랑 비교해보면, 지금 파주에서 사는 느낌이 어때?

많이 달라. 용산구 청파동에 살 때는 사실 생활환경에 그렇게 만족하진 않았어. 좋았던 건 놀 수 있는 이태원이 가까웠다는 거 말고는 딱히 없었고. 그래도 청파동에 살면서 친구들이 생긴 건 맞아. 지금 있는 친구들 대부분이 그때 알게 된 사람들이거든. 화양동, 그러니까 건대 쪽으로 넘어가서는 또 다른 의미로 좋았어. 일단 집 주변에 음식점이 진짜 많았고, 바로 앞에 시장도 있었거든. 그래서 확실히 잘 먹었던 것 같아. 사람이 주변 환경 영향을 진짜 많이 받는다는 걸 그때 느꼈어.

그에 비해 요즘 생활은 꽤 미니멀 해졌을 것 같은데, 요즘 하루 일과를 소개해 줘.

부모님이 파주에서 호텔을 운영하신 지가 거의 10년 됐거든. 그 일을 돕고 있어. 아침 10시에 출근해. 오전에는 객실 점검부터 하고, 오후부터는 손님들 오니까 객실 예약 관리하고. 그리고 일하다 보면 진짜 별일이 다 생겨. 누수 생기고, 객실에 문제 생기고, 전기 안 되고, 물탱크 물 떨어지고. 듣기만 해도 막막한 일들이잖아. 근데 다행히 아빠가 예전부터 건축 쪽 일을 좀 해와서 건물 관리 같은 건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어.

이제 가족 일을 같이 하는 거니까 그런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네.

근데 요즘 아빠가 가끔 그런 얘기를 해. “내가 없으면 네가 해야지”. 그럴 때마다 좀 묘해. 아빠 없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들고. 이걸 내가 어떻게 감당하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월급 받는 사람일 때는 사실 매출이 어떻든 내 월급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더라. 이번 달 매출이 너무 안 좋아서 거의 마이너스일 것 같을 때가 있어. 그러면 내가 월급을 받는 것 자체가 진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해.

그 말 들을 때마다 책임감이 확 올라오는 느낌일 것 같아.

그 월급으로 소비하는 것도 되게 기분이 이상해. 예전처럼 ‘월급 받았으니까 써야지’ 이런 마음이 전혀 안 들어. 요즘 경기도 정말 안 좋고, 근데 이게 우리 호텔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동네 상권 전체가 그런 느낌이야. 내가 나이가 들어서 현실적으로 느끼는 건지, 아니면 책임감이 커진 건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더 고민돼. 여기서 돈을 모아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할까. 그게 아직은 잘 안 보이는 상태야.

근데 그런 고민 얘기 듣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네가 되게 자유롭게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더라. 너 스스로는 그 자유로움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해?

현실적인 기준은 분명히 있는 편이야. 돈도 모아야 하고, 직장이 있어야 살 곳도 마련할 수 있고, 그런 최소한의 책임 같은 건 생각해. 근데 또 한편으로는, 너무 사회와 타협하고 싶지는 않은 거야. 뭔가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은 느낌. 그게 나한테는 타투인 것 같아. 약간 그런 거 있잖아. 나만의 자아가 있는데 내가 사회 안에서 점점 그냥 흔한 사람, 일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게 너무 강해지면 타투가 하고 싶어져. 타투를 하면서 그 감정이 좀 해소되고, 그게 나를 붙잡아주는 방식이 된 것 같아.

그나저나, 고양이 ‘진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청파동에 살 때, 그때 내가 솔로였는데, 연애도 하고 싶고 그래서 계속 데이트를 나갔거든. 근데 잘 되나 싶으면 어그러지고, 또 잘 되나 싶으면 어그러지고. 계속 그런 식이니까, 마음이 많이 외로웠던 것 같아. 그전에는 연애를 비교적 길게 해서 그런지 누군가에게 기대면서 지내다가 혼자 나오니까, 그 공백이 확 느껴졌던 거지. 그때 내 통장에 진짜 30만 원밖에 없었어. 근데 그게 내 전 재산이었거든. 그 돈으로 진지를 산 거야.

계산해서 한 선택이라기보다 그때의 너한테는 그게 꼭 필요한 결정이었을 것 같아.

심지어 원래 30만 원도 아니었어. 진지를 분양하던 곳이 인천에 있는 한 펫샵이었는데, 거기가 되게 특이했어. 희귀 동물만 모아놓은 샵이었거든. 콘셉트부터가 좀 기괴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얼마못가 망했어. 그래서 동물을 그냥 세일처럼 파는 거야. 나는 별생각 없었다가 갑자기 사장님이 “30만 원이에요.” 이러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근데 웃기게도, 그때 내 통장에 딱 30만 원이 있어서 진지를 입양하게 됐지.

진지는 지금 네 인생에서 어떤 존재야?

진지는 나랑 함께 시간을 통과한 존재인 것 같아. 20대 중후반에 만났고, 얘가 수명을 다하면 내가 한 40살쯤이잖아. 그러니까 거의 25살부터 40살까지를 같이 산 거지. 그 이후의 인생은 너무 먼 미래라 나도 잘 모르겠고, 또 어떤 동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고. 근데 진지랑 지내면서 삶이 불만족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그냥 되게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잘 맞는 애를 만났지, 이런 느낌. 이런 애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약간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그냥 딱 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진지를 만나고 환경이 계속 바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같이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

서울에 살 때도 엄마가 진지는 파주에 두고 가라고 했거든. 근데 난 그게 너무 싫었어. 진지 없이 나 혼자 서울로 다시 돌아가면, 거기서는 삶의 의미 같은 게 사라질 것 같았어. 그래서 그때 직업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진지가 계기야. 먹고사는 건 그냥 대충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진지 사료값도 벌어야 하고 병원도 가야 하니까 그땐 진짜 돈이 필요하더라고. 자식 때문에 돈 벌게 되는 마음이 뭔지, 그때는 진짜 알겠더라.

어쩌면 진지와 함께 이 집을 고른 거나 마찬가지네.

맞아. 여기는 그냥 내가 고른 집이라기보다 어쩌면 진지 집이라고 생각해. 진지도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생각해보면 이 집이 마음에 드는 이유 중 하나가 세로로 긴 창문이 진지 눈높이에 있다는 거야.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얘가 창밖을 이렇게 구경하는 걸 보고 나니까 침대 프레임을 못 사겠더라. 그래서 그냥 그 마음을 접었어.

종훈

Big Issue Korea Vol. 344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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