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시선, 높은 마음

2025년 11월 20일

혼자 사는 집, 가족이 함께 사는 집과 달리,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에 들어서면 ‘선택’의 의미를 자연스레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집’이라는 장소가 단순히 머무는 곳이나 누군가 만들어 준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그런 공간 안에서는, 나는 이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다정하면서도 치밀한 과정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영이 좋아하는 어머니의 그릇, 그 안에 담긴 근우의 요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비정형 테이블의 곳곳까지, 두 사람의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오늘은 높고 밝은 통창 너머로 시선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민영과 근우의 집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친구들과 쉐어하우스에서 지내시다가, 최근 민영 님과 근우 님이 함께 독립해 살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두 분이 연인으로서 함께 살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민영: 저는 생각보다 노마드 삶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어요. 학교다닐 땐 작업에 푹 빠져 캐리어를 들고 보름 동안 집에 안 들어온 적도 있었거든요. 쉐어 하우스에 처음 살았을 때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여기가 내 집이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늘 ‘내 집이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같이 살다 보니 근우가 잘 정돈된 삶을 살더라고요. 저는 취향은 있지만, 그 취향대로 살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정돈을 좋아하는 사람과 살다 보니 ‘이왕 정리할 거면 내 취향대로 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둘이 독립하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동거를 시작하신 거네요. 두 분 모두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 집을 처음 보셨을 때 앞으로의 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지셨나요?

근우: 10곳이 넘는 집을 봤는데, 처음엔 투룸을 원했거든요. 이 집은 원룸이고, 사진상의 첫인상은 사실 별로였어요. 그래도 통창이 마음에 들어 ‘혹시 모르니 한 번 보자’ 하고 실제로 보러 갔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공간 분리가 안 돼 있어 넓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룸에 비해 월세가 저렴한 대신에 절약한 월세만큼 인테리어 비용으로 투자하자고 합의하고 계약했죠. 민영이 ‘공간을 분리하면 넓어 보일 것’이라고 몇 가지 아이디어를 줬는데, 그걸 적용하니까 지금처럼 훨씬 넓어 보이고 쾌적한 집이 됐어요.

원룸에 가벽을 세워 침실을 만든다는 건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민영 님이 미술 작업 경험이 많아서인지 인테리어에 대한 감각이나 노하우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 혹시 공유해주실 만한 팁이 있을까요?

민영: 저는 직업 특성상 업자 분들을 잘 알고, 이 예산으로 어디까지 작업이 가능한지 대략 감이 와요. 이번에 저희를 도와주신 분에게 고마웠던 점은 ‘예산 상관없이, 시도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해 달라’고 한 점이었어요. 인테리어를 처음 해보는 사람들은 ‘이건 예산에 안 맞을 거야’ 하고 지레 겁먹고 아예 말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일단 원하는 걸 다 말하면, 현실화 될 가능성이 생겨요. 그분은 제 꿈을 최대한 실현시키려고 원래 예산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본인이 더 고생해서 해주셨어요.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건 결국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일인데, 각자의 삶은 잘 유지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혹시 정돈이나 취향의 차이 때문에 부딪히거나, 반대로 타협해야 했던 순간은 없었나요?

근우: 제 취미는 요리인데, 벽을 보고 요리하는 건 싫었어요. 대부분 오피스텔 부엌은 벽을 마주하거나 구석에 있잖아요. 여긴 통창이 크니까, 창밖을 보며 요리할 수 있도록 아일랜드 선반을 만들고 싶었죠. 또 집에 오븐과 건조기를 들이고 싶었는데 아일랜드 아래에 설치했어요. 저는 이렇게 실용성을 중시하는데, 민영은 ‘실용적인 것일수록 최대한 보이지 않게 숨겨야 한다’는 주의예요.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걸 말하면, 민영이 그걸 눈에 띄지 않게 디자인에 녹여주는 식으로 맞췄어요.

그런 센스 덕분인지 집이 한층 넓게 느껴지더라고요. 곳곳의 숨은 디테일들이 모여 공간을 더 확장된 듯 보이게 만든 것 같은데, 대표적으로 어떤 변화를 주셨나요?

민영: 가장 먼저 창문 프레임 색을 조정했어요. 검정색 프레임은 바깥 풍경과 대비가 강하게 생겨 프레임만 눈에 띄고 배경은 흰색으로 보이기 쉽거든요. 나무 톤 시트지로 바꾸니 바깥 색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풍경이 더 눈에 들어오고, 공간이 넓어 보이는 효과가 생겼어요. 또 바닥과 프레임 연결 부분도 원래 검정색으로 단절되어 있었는데, 나무 색으로 이어주니 확장된 느낌이 나죠. 모서리에 두는 식물도 중요한데, 큰 잎 식물은 앞에서 시야를 막지만, 여리여리하고 가지가 긴 식물은 구석까지 시야가 열리게 해요. 완강기 같은 노출된 요소도 벽지와 비슷한 색감으로 감춰서 깔끔하게 만들었어요.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놓치기 쉬울 만큼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요소들 가운데, 그럼에도 가장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테이블은 누구의 아이디어로 선택하게 된 건가요?

근우: 각자의 집에 대한 로망을 이야기하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찾기 시작했어요. 과감하게 비정형 테이블을 갖고 싶었거든요. 친구를 자주 초대하는 편이라, 집 크기 대비 테이블이 충분히 컸으면 좋겠더라고요. 이동할 때 모서리에서 부딪히지 않도록 둥근 형태면 이동에 불편이 없으면서도 보기 좋을 것 같았죠. 그래서 조약돌 모양 같은 독특한 테이블들을 찾아보다가 이 테이블을 발견했어요. 처음에는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집에 설치해 보니 딱 맞더라고요. 이 집의 가구를 살 때는 테이블을 좋은 걸 사고, 나머지 의자들은 중고로 해결했어요.

민영 님도 그 선택에 동의하셨나요?

민영: 테이블 하나의 가격이 인테리어 전체 예산과 비슷했는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가구는 다음 집으로도 가져갈 수 있으니까, 어느 공간에서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거든요. 젊었을 때 이렇게 기본을 채워놓고 생활하면, 굳이 지금 당장 궁상맞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조금 무리를 했던 것 같아요. 이사하면서 근우와 자주 얘기했던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평생 돈을 모아 집을 사면 삶이 한번에 바뀔 것 같다는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그게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뜻으로 들려요.

근우: 맞아요. 처음부터 많은 투자를 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민영이 설득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지금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과정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집을 거처가는 곳으로만 생각하고 기숙사처럼만 살면, 하루하루가 단지 미완성인 상태로 지나가 버리잖아요. 민영이는 ‘오늘 하루하루 사는 시간이 중요하다. 자기 취향을 담아 꾸미고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럼 조금 투자해서, 집에 오면 완전히 쉴 수 있고, 기분 좋은 공간을 만들어보자’하고 결정했죠.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함께 사는 삶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민영: 이집에 이사 오고 나서는 ‘내 집’이라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우리집’이라는 의미가 제게 너무 크더라고요. 그래서 안 하던 일도 해보고 싶어졌어요. 예를 들어 미라클 모닝이나 아침마다 레몬 물을 마셔야겠다는 작은 실천도 하고요. 전에 살던 쉐어 하우스는 방마다 암막 커튼을 쳐서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했는데, 여기는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아침을 맞이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출근 전에도 밥을 해 먹고, 커피를 마시며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출근해요. 공간이 바뀌니 생활 습관과 마음가짐도 함께 바뀌는 것 같아요.

지금 두 분의 삶을 얼핏 엿보니, 삶에 대한 확신이 손길에서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맥락에서 매일 하는 요리와 그 요리를 담는 그릇들도 인상적이에요. 어머님의 도자기를 이 집에 어울리게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해요.

민영: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려고 모아둔 이 도자기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엄마의 꿈이 실현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그 도자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언젠가 신혼집이 생기면 내가 물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이 집에 하나둘 가져오고 있어요. 친구에게도 말했어요. “몇 억짜리 아파트가 있어도 필요 없고, 엄마 도자기를 다 가져오는 게 내게 중요한 일이야. 이게 내 유산이 되는 거니까.” 처음에는 친구가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즘 저는 엄마 도자기를 쓰며 밥을 먹는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해요.

그 외에 개인적으로 이 집에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부분은 어디인가요?

민영: 집 안 곳곳에 제가 전시할 때 사용했던 좌대들이 가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거예요. 첫 개인전 때 글을 올려놓던 책좌대도 있어요. 작품 제목은 ‘눈높이 vs 낮은 곳’이었어요. 보통 사람 평균 눈높이가 150cm 정도라, 미술관에서는 주로 이 높이에 초점을 맞추는데, 중요한 정보나 공익적 정보는 꼭 평균 눈높이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래서 글들을 모아 가장 낮은 위치에 배치했죠. 평균치가 아니라 누구든 볼 수 있는 낮은 위치가 더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전시에서 사용했던 좌대들이 지금 집에서는 인테리어 역할을 하면서, 지난 전시를 회상하게 해주고 있어요.

민영 님은 미술가이자 인권활동가로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요즘 가장 많이 떠올리는 생각은 뭐예요?

민영: ‘시좌(視座)’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해요.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뜻해요. 즉, 앉아 있는 위치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 의미죠. 사람들은 이 단어를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이는 다양한 가치관의 존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성공에 대한 관점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요. 저는 인권활동가의 자리에 앉아 미술을 보는 게 좋아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맞는 것 같고, 그 위치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좋아요. 즉, 윤리성과 사회적 필요 속에서 쉽게 떠날 수 없는 자리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경험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두 사람에게 요즘 가장 행복한 장면은 언제인가요?

근우: 저는 부엌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아일랜드 테이블에서 요리할 때가 가장 좋아요. 민영이 앞에서 예쁜 오브제들을 두고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고요. 요리하면서 민영이 소파에 앉아 먼지를 치우거나 집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좋아요.

민영: 저는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고,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 있을 때가 있어요. 근우가 그 모습을 보면서 커피를 내려주는 시간을 기다리는 순간이 좋습니다. 요즘은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그런 소소한 기다림과 하루를 시작하는 작은 루틴이 재밌고 행복하게 느껴져요.

민영과 근우

Big Issue Korea Vol. 339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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