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반, 진담 반

2025년 11월 20일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후자는 대체로 남에게도 관대한 편이지요. 저도 한때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 사회화가 된 건지, 꽤 늦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성은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약속에 ‘늦는’ 사람이기보다는 아예 시간의 개념이 다른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거울 치료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점이라면 성은은 자신만의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이고, 그 시간을 카메라와 글에 담는 사람이에요. 지금에 몰입하고, 현재를 결코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와 친구로 지내는 이상 시간 문제로 다툴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마운 건, 그녀 덕분에 조금씩 늦는 제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죠. 오늘은 그런 그녀의 집이 있는 후암동에 가보았습니다.


이 집에 어떻게 이사 오게 됐는지 궁금해.

전에 살던 집이 연희동에 있었어요. 거긴 원래 가구 디자이너가 살던 집이라 인테리어가 정말 예뻤거든요. 예전에 와봤잖아요, 근데 그 집이 좀 외진 골목에 있는 빌라였고, 입구에 현관문이 따로 없는 구조였어요. 그래서 밤에는 드라마 〈시그널〉에 나올 것 같은,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다음에 이사할 땐 꼭 비밀번호로 열 수 있는 현관문이 있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어. 연희동 집이 꽤 좋았던 기억이 나거든. 능력있는 프리랜서구나 싶었지. 후암동으로 이사했길래 그냥 조금 더 힙한 곳으로 이사한 줄 알았어.

사실 연희동에서 거의 4년 정도 살다 보니까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그 당시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용산 일대가 갑자기 인기가 많아졌거든요. 그래서 ‘나도 용산에 살면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약간 헛된 희망도 있었어요(웃음).

후암동은 권력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긴 하는데, 이 동네 첫인상은 어땠어?

이 동네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어요. 처음 와보니까 서울역에서부터 언덕을 올라와야 하잖아요. 막 올라오다 보니까 ‘여기, 산속이야?’ 싶을 정도로 높이 있어서 진짜 충격받았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고, ‘여긴 아니다’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는데,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배경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약간 옛날 동네 같고, 영화 속 배경처럼 따뜻하면서도 현실적인 풍경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부터 이상하게 자꾸 이 동네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여기로 이사 오게 됐어요. 이 동네엔 약간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것 같아요. 프리랜서거나, 힙스터가 되고 싶거나, 아파트에 못사는 사람들이요.

그럼, 이 집이 작업 공간이 되기도 해? 아니면 주로 밖에서 일해? 프리랜서로 일한 지도 거의 꽤 오래된 걸로 아는데 선호하는 작업 환경이 어떤 편인지 궁금해.

집에서는 일이 잘 안돼요. 자꾸 눕게 돼서요. 카페에서도 절대 일을 못 해요. 조용해야 하고, 가능하면 좀 어두운 곳이 좋아요. 약간 독서실 같은 분위기랄까. 그래서 지금은 서울역 근처에 있는 공유오피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거기도 완벽하진 않아요. 너무 밝아요. 24시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서 약간 오피스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래도 뷰가 진짜 좋아요. 창밖으로 고층 빌딩들이 딱 보이는데, 그걸 보면 로펌에서 일하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나도 루저가 아니다’라는 착각을 잠깐 하게 해주는, 그런 뷰. 그래서 월세가 일종의 ‘뷰 비용’이라고 생각해요.

이 집에선 주로 생활을 하고, 작업할 때는 노마드처럼 지내는 거네. 2023년에 첫 책 인터뷰 산문집 <궁금한 건 당신>이 나왔고, 요즘은 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어?

그 뒤로 새로운 책을 내보겠다고 돈 안 벌고 글만 쓰다가, 결국 글도 잘 안 써지고 돈도 못 벌어서 우울했어요. 그래서 ‘이제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 싶던 중에 각종 영상 만드는 게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결혼식 영상 촬영 일을 하는데, 그냥 사람들의 따뜻한 순간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담아두는 거. 그게 나한테는 되게 좋은 일 같아요. 그게 재밌는 이유는, 내가 직접 나오지 않아도 되고, 마치 VJ처럼 현장을 기록하면서 사람들 자신도 모르는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거에 기쁨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창작자로서 두 번째 책 작업은 더 어려워? 평소에는 영감을 어떻게 찾는 편이야?

당연히 고민은 있어요. 예전에는 그냥 그때그때 느낀 걸 쓰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재미있었는데,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갑자기 뭔가 막막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글이 흑역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출판을 주저하게 되기도 하고요. 근데 이게 나만의 흑역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흑역사도 함께 담기니까, 타인과의 기억을 글로 다듬는 것도 어렵긴 해요. 허락받고 사소한 수정요청을 받는 것 때문에 마무리를 회피하게 되고, 약간 게으른 완벽주의도 섞여 있고, ‘내 마음에 드는 좋은 걸 만들고 싶지만 게으른 나’라서 힘든 것 같아요.

공감된다. 그래도 한번 해봤으니까 두 번째 책이 더 기대되나 봐.

고마워요. 얼마 전에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 나르시시스트 같지만, 어쩌면 나도 천재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요. 누군가를 향한 질투나 부러운 감정은 당연히 있었죠. 근데 공통점은, 재능 때문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힘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깨달음이 왜 저한테 중요한가 하면, 제가 자존감이 낮아서 자주 위축돼 있었거든요. ‘나는 별로 재능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나니, 내가 부족한 건 재능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힘, 게으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시스템 밖에서 혼자 동력을 만들어야 하니까, 가끔 동력이 떨어지면 주저앉고 그걸 반복하게 되더라고요.

30대 1인 가구 프리랜서로서, 작가로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삶을 사는데, 이런 삶을 주저하는 다른 여성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 있을까?

오늘 누군가 저한테 DM으로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성은 님, 너무 멋있어요. 고유한 길을 개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은 어렵지만, 그 길을 뚜벅뚜벅 걷는 모습 늘 응원합니다.” 근데 저는 솔직히 고유한 길을 개척한다기보다, 정상적인 길을 가는 게 더 어렵다고 느껴요. 대부분 사람들이 ‘정상적인 길’을 흥미롭게 여기지 못해도, 그 궤도 안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잖아요. 소개팅도 하고, 성공을 위해 1등도 해야 하고, 근데 저는 그럴 멘탈과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정상의 삶’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오히려 더 큰 용기와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성은의 방식이 또 어떤 면에서는 더 진솔하게 느껴지곤해.

정상성을 추구하면서 얻는 고통이 실제로 많은 여성들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은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타협하면서 인생의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다음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글로 써서 책까지 내는 게 너무 좀 징징거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멈칫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승화할까 고민하다가, 스탠드업 코미디로 풀어보면 어떨까도 싶었지만, 코미디를 한다고 그런 문제들이 승화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껴요.

삶에 대해 생각할 때, 요즘은 어떤 순간이나 문장에서 위로를 받아?

얼마 전에 교회 결혼식에 갔던 일이 생각나요. 목사님 말씀 중에 ‘결혼하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고, 신뢰가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럴 때 성경을 펼치고 교회에 오면서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왠지 듣고 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거예요. 자신감이라는 게 ‘내가 멋져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라, 두 약한 사람이 결혼하면서 겪게 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에서 오는 자신감이더라고요.

사랑을 지탱하는 힘이 결국 ‘완벽함’이 아니라 ‘함께 버텨내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게 마음에 와닿네.

맞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자신감은 신자유주의적인 성공에서 오는 것뿐이고, 사랑에 대한 자신감은 부족한 편이에요. 예를 들어 누가 짜증나게 하면 풀려고 노력하기보단 거리를 두고 다시 다가가지 않으려는 마음들. 되려 가까운 사이에서 더 자주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종교라는 공동체는, 그런 메마른 마음을 조금씩 적셔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어요. 친구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길래 너무 종교에 의지하는 게 걱정된 적도 있었는데,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누구나 자기의 편견이 깨지기를 기다리고, 그런 역할을 예술가가 하는 것 같아.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복잡한 걸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건 물론, 내 이야기야.

결국 내 안에 교회에 가진 편견이 있었는데, 그 순간 그 편견이 깨지면서 감동을 받은 거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자기 편견이 강화되는 이야기를 즐기지만, 동시에 그 편견이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요 

정성은

Big Issue Korea Vol. 341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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