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법

2025년 07월 20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온라인에서 한 번쯤 봤을 그 유명한 퇴사 짤. 어떤 날엔 그냥 웃고 넘기지만, 어떤 날엔 그 문장을 가만히 곱씹게 될 때가 있어요. ‘진짜 저렇게 훌훌 떠나버리면, 그다음은 어떻게 살까? 정말 자유롭고 행복할까? 아니면 다시 또 막막함이 찾아올까?’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다음 챕터를 열기 전에 스스로를 좀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한 시간. 누군가는 그걸 휴식이라 하고, 누군가는 전환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인생 전체를 다시 짜보는 기회로 삼기도 해요. 성호형은 자신의 직업을 ‘백수’라고 쿨하게 말하지만, 농담처럼 덧붙이는 ‘홈프로텍터’라는 호칭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자조 사이 어딘가의 감정들이 오히려 지금의 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비싼, 그래서 가장 열심히 활용해야 하는 공간’인 집. 오후의 커피 향이 머물고, 창문 너머 빛이 느슨하게 번지는 그 공간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용산구 후암동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습니다.


10년 넘게 일한 회사를 그만두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것도 대단한 일이고요. 문득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저, 퇴사하겠습니다’라고 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맞아요, 10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결국 퇴사를 결심한 건 ‘번아웃’ 때문이었어요. 퇴사 전 1년 정도는 심리 상담도 받았어요. 그때는 자기 효능감이 정말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거든요. 지금 돌아보면, ‘나는 과연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회의감도 강했고요. 일은 계속 쌓이는데 그걸 해내는 힘이 점점 없어지고, 일과 삶의 경계는 점점 흐려졌어요. 퇴근해도 일 생각이 끊이질 않고, 몸도 마음도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꼭 회사 안에서만 해답을 찾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은 일을 멈추고, ‘쉬면서 다시 생각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퇴사를 결정하게 됐어요. 아주 큰 결단이었지만, 지금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시간에 비하면 1년의 휴식은 길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어땠나요?

진짜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벌써 쉰 지 1년 됐어?” 하고 놀라기도 해요. 하루하루는 정말 별거 안 했는데요, 그냥 책 좀 읽고, 카페 돌아다니고, 밥 해먹고… 그렇게 세 끼 챙기면 하루가 다 가더라고요.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꽉 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경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한 시간’ 같지만, 그게 꼭 비생산적인 건가 싶기도 해요. 쉬는 시간까지 생산성을 따지는 게 과연 맞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를 뒤늦게 실감하기도 했어요.

쉬는 동안엔 오히려 바쁠 때는 못 보던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잖아요.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하고 새삼스러운 발견 같은 거요.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있었죠. 예전부터 소셜미디어에 짧은 농담 쓰는 게 소소한 취미였거든요. 누군가 운동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듯이, 저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즐겁더라고요. 근데 일할 땐 그 짧은 글 하나 쓸 여유도 없었어요. 매일이 정신없이 흘러갔으니까요. 그런데 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냥 재미로. 그게 오히려 ‘아, 이게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어느덧 마흔이 됐네요. 예전엔 ’마흔‘하면 인생의 터닝포인트 같은 느낌이 강했는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 느끼는 마흔은 어떤가요?

예전엔 마흔이면 진짜 어른 같고, 이제 인생 정리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나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내가 마흔이 되고 보니까, 그냥 30대가 쭉 연장된 느낌이에요. 마음은 성숙해지지 않았는데, 나이만 먹은 느낌? 그렇게 살다 보니 마흔이 되었더라고요. ‘불혹’이라는 말이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라지만,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유혹 자체가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흔들릴 일도 덜 한 느낌이랄까. 뭔가 철은 안 들었는데 감정의 진폭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에요.

마흔이 되면 뭔가 인생의 방향이 잡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도 있을 것 같아요. 요즘처럼 다들 늦게 시작하는 시대엔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사회생활도 30대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뭔가를 이룰 시간도 짧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40대가 됐는데도 ‘내가 뭐 이룬 게 있나?’ 싶고, 현타가 와요. 저도 마흔쯤 되면 ‘아, 이제 나는 이렇게 살면 되겠다’ 하고 방향이 잡힐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여전히 ‘내가 뭘 잘하지?’ ‘어떻게 살고 싶지?’ 그런 고민을 더 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삶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는 게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도 되는 거죠. 선택지가 많으니까 더 어렵고요.

조금 단도직입적일 수도 있지만… 40대 백수의 삶이란 건 어떤 느낌일까요? 막연히 불안하거나 외롭진 않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불안은 기본값으로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 불안이 막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보다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던져졌는데 구명보트 하나 달랑 있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에 가까워요. 외로움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외로움이 당연한 감정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다만, 요즘은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를 많이 내려놨어요. 그냥 그날그날 밥이 맛있고, 글이 잘 써지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기대를 덜 하니까 마음이 더 편해지더라고요.

혼자 살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삶이란 게 어떤 걸까요? 물리적으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기분, 그런 게 가능한 걸까요?

제가 지금 후암동에 살고 있는데, 이 동네로 이사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애인을 포함해서 가까운 곳에 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실제로는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안심되더라고요. 이 동네엔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서로의 존재를 크게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요. 그게 심리적으로 꽤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오늘 대화를 하다 보니까, 결국 나이보다 더 중요한 건 살아온 방식과 관계에서 생기는 ‘매너’나 ‘자세’ 같은 것 같아요. 어른의 에티켓이란 뭘까요?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저한테는 ‘적당한 거리 유지하기’인 것 같아요. 너무 가까우면 오지랖이 되고, 너무 멀면 관계가 끊기는 것 같고요.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간섭은 안 하는 거리, 그게 마음 편한 것 같아요. 어릴 땐 서로 열정적으로 케어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자 에너지가 달라졌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리 조절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꼭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든든한 관계. 그게 어른의 관계 아닐지 생각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성향이 느껴져요.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에스트로겐 많은 남자‘ 줄여서 ‘에겐남’이라고도 부르잖아요. 요즘엔 어떤 취미에 빠져 있어요?

맞아요, 그런 표현이 있죠. 저도 약간 그런 스타일인 것 같아요.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서울 곳곳 좋아하는 공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풍미의 커피를 즐기는 재미가 커요. 후암동은 그런 취미를 즐기기엔 정말 좋은 동네예요. 얼마 전엔 집 근처에 참외 빙수랑 오이 아이스크림만 파는 디저트 가게가 생겼는데요, 그런 실험적인 가게들이 계속 생겨나는 분위기가 참 좋아요. 아직 지대가 비싸지 않아서 자영업자들이 도전할 수 있는 동네라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이 동네만큼이나 지금 사는 집에 대한 애착도 클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랑 퇴사하고 나서 집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활용 방식이 좀 달라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완전 달라졌어요. 회사 다닐 때는 집이 그냥 잠자는 곳,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곳이었죠. 그런데 퇴사하고 나니까 밖에 나가는 것도 다 돈이더라고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오래 앉아 있으려면 괜히 눈치도 보이고요. 그래서 집을 제대로 활용하기로 했어요. 제 사무실이자 놀이터, 때로는 친구를 초대하는 곳. 제가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이 집은 혼자 살고 있다는 느낌이나 효능감을 되찾게 해주는 존재예요. 정말 고마운 공간이에요.

마지막으로, 평소에 ‘이런 삶의 방식은 부럽다’ 싶은 게 있다면 어떤 걸까요?

요즘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하루 10분, 그냥 아무 말이나 쓰라는 내용인데요, 쓸 말이 없으면 ‘쓸 말이 없다’고 쓰라는 거예요. 예전엔 일기 쓰는 것도 귀찮아서 방학 끝나고 몰아서 쓰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적어두려고 해요. 짧아도 좋으니 그때그때 생각을 기록하는 삶, 그게 요즘 부러운 삶의 방식이에요. 언젠가 그 메모들 속에서 글이 나오거나, 그때의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그렇게 조금씩 써보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전성호

Big Issue Korea Vol. 337

글: 정규환

사진: 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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