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하는 생활

2026년 08월 17일

어떤 순간은 언어로 맺히고, 어떤 순간은 이미지로 맺혀요. 앞의 것을 시라고 부르고 뒤의 것을 사진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김현 시인의 주머니에는 작은 카메라가 들어 있어요. 출퇴근길 육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조금 이상하거나, 혹은 시적이거나 싶으면 찰칵 셔터를 누릅니다. 광장에 가만히 서 있던 두 사람을 찍은 것도 그런 순간이었대요. 그리고 사진 수업에서 배운 한 가지는, ‘사진은 꼭 인화해서 볼 것’. 찍는 것만으로는 아직 본 것이 아니어서 시간을 들여 종이 위로 불러내야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집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 반 전 어느 겨울, 그는 아무것도 들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텅 빈 집에 도착했습니다. 식탁도 소파도 침대도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전부였던 계절을 지나, 소파를 들이고 화분을 데려오고 이불을 빨아 볕에 너는 시간을 거치며, 어느덧 그곳은 볕이 들고 초록이 자라는 사뭇 또렷한 집이 되었습니다. 언어는 시가 되어 종이에 찍혀야 하고, 이미지는 인화지 위에 맺혀야 비로소 완성되듯, 누군가에겐 그렇게 현상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천천히 해상도를 맞춰가는 생활을 보러, 현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현관부터 빼곡하게 붙은 사진과 마그넷들에서 저마다의 질서가 읽혀요.

현관에는 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들을 많이 붙여두었어요. 퀴어한 사진들도 있고, 대부분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에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사진반 친구들, 회사 동료들, 대학과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글 쓰는 동료들까지. 처음엔 몇 장 없었는데, 이걸 하나씩 채워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나갈 때마다 기분 좋겠는데요, 이 문을 열면 친구들이 배웅해주는 거잖아요. 근데 그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을 텐데, 어떻게 파주까지 오시게 된 거예요?

같은 보증금으로 좀 더 넓은 집에 가고 싶었어요. 서울에서 찾다 보니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직장이 망원동이라서, 집이 넓으면서도 출퇴근하기 괜찮은 지역이 어디일지 고민하다 경의중앙선과 3호선 라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오게 됐어요. 그러다 운정까지 알아보게 됐는데, 가격 대비 넓고 좋아서 이곳으로 오게 됐죠.

‘작가는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 지나가듯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막상 둘 다 살아보시니 어때요?

꼭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보니 글을 쓰는 데는 파주든 서울이든 큰 영향이 없더라고요. 지금 이사 온 지 1년 6개월쯤 됐는데, 초반 반년 넘게는 지난 연애의 감정을 수습하느라 이 집이 설레는 공간은 아니었어요. 그냥 누워 있다가 출근하는 정도의 느낌이었죠.

설레는 집이 아니었다는 그 반년, 이 집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요.

12월 말에 이사를 와서 그런지 더 황량하게 느껴졌어요. 환경도 낯설고 집도 낯설고, 스스로도 완전히 다운돼 있는 상태였죠. 거의 출퇴근만 하다가 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생활이었고, 사실 물건도 거의 없었어요. 식탁도 소파도 침대도 없었죠. 그때는 아무것도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언제 또 떠날지 모르니까 짐을 많이 두지 말자는 생각으로 텅 빈 채로 지냈는데, 주변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2년은 이 집에 살 텐데, 정을 붙이려면 물건이 좀 있어야 한다.”고요.

몇 개월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스스로도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제가 정을 주지 않으니까 이 집도 계속 차가운 집으로 남아 있는 거구나 싶어서, 소파도 들이고 식탁도 들이고 침대도 들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짐이 하나둘 늘어났고, 물건이 채워지니까 집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쉬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고, 잠도 편안하게 자게 되면서 아늑한 느낌이 생겼어요. 그렇게 한 반년은 부적응기, 그다음 반년은 적응해가는 과도기, 나머지 반년은 운동도 글쓰기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어느 정도 루틴이 잡히는 적응기였던 것 같아요. 1년 반이 걸린 셈이죠.

부적응기, 과도기, 적응기. 1년 반 걸려 도착한 요즘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평이한 날이면, 아침 5시 반에서 6시쯤 일어나서 운동을 먼저 해요. 자전거를 타거나, 근린공원을 도는 달리기를 했었죠. 들어와서 글 쓸 게 있으면 조금 쓰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출근 준비를 해요. 저녁에 특별한 일정 없이 돌아오면 산책하고 밥 먹고 다시 산책한 뒤 잠자리에 들어요. 저녁에는 글을 잘 안 써요, 에너지가 없어서요. 대신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같아요. 주말도 달라졌어요. 부적응기에는 눈을 뜨자마자 무조건 서울로 나가서 예전에 살던 동네 카페에 가서 하루를 보내곤 했죠. 지금은 적응이 돼서, 일어나면 밀린 집안일과 이불 빨래 같은 것들을 해두고,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보다가 저녁 무렵엔 자전거를 타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것 같아요.

아침마다 쓰신다는 글, 인스타그램에서도 늘 잘 읽고 있거든요. 가장 최근에 쓴 글은 어떤 내용이었어요?

경의중앙선을 타고 다니면서 글쓰기 루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하철에서 이동할 때 되도록 짧게라도 글을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거든요. 얼마전, 저희 아파트 단지 바로 옆 동에 불이 났었어요. 그 소식을 회사에서 뉴스 속보로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마침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앞에는 시켜둔 생수가 배달돼 있었고, 마침 분리수거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평소처럼 쓰레기를 내놓고 있었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풍경이었죠. 그렇게 큰 불이 나서 뉴스에까지 나왔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어요. 삶이라는 게 이렇게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는 거구나, 잘 살다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글을 썼어요.

현재에 집중하자는 마음이요. 그럼 요즘 현 님의 현재를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건 뭐예요?

요즘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어요. 대학 시절이나 사회초년생 때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필름카메라도 쓰고 DSLR도 들고 다녔는데, 한동안 그 취미와 멀어져 있었어요. 그러다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서울의 카페 밑줄에서 듀엣 낭독회를 오래 해왔는데, 그 친구들 중에 오랫동안 취미로 사진을 해온 선재라는 친구를 중심으로 사진반을 열어 월 한 번씩 모이고 있어요. 그 김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추천받아서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소형 카메라를 하나 마련했어요. 그걸 늘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찍고 있어요.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는 그 카메라, 소개해주세요.

캐논사의 콤팩트카메라예요. 빈티지 제품이 아니라 예전 모델을 최근에 다시 출시한 복각판이에요. 산 지는 몇 개월 됐어요. 크기가 작아서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으니까, 오히려 장난감처럼 수시로 꺼내 찍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엔 빈티지 필름카메라도 하나 샀는데, 그건 확실히 손이 덜 가요. 크기도 크고 초점도 신경 써서 맞춰야 하다 보니, 특별한 순간이 아니면 잘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시인이 렌즈로 세상을 보는 감각은 어때요? 시 쓰는 것과 비슷한가요?

비슷하다고 느껴요. 시라는 것도 결국 어떤 순간이 언어로 풀려나오는 일이잖아요. 사진은 그 순간이 언어 대신 이미지로 풀려나오는 거고요. 조금 특이하거나 이상하거나 혹은 시적이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로 셔터를 누르게 돼요. 언어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여러 필터를 거쳐 풀어내야 하는데, 사진은 그 필터가 훨씬 덜한 느낌이에요. 직관적으로 찍으면 되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더 순식간에 창작이 이루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그 즉각적인 포착의 매력에 이끌려서 찍는 것 같아요. 흔히 시를 언어의 형상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시적인 작업을 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는 것 같아요.

보여주신 사진들에 그 순간들이 담겨 있는 거네요. 요즘은 어떤 걸 찍고 있어요?

주로 파주 운정의 풍경들을 찍고 있어요. 걸어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육교를 자주 건너게 되고,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으로 찍는 걸 좋아하게 됐어요. 새로 생긴 쇼핑몰의 광장을 내려다보면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고 지켜보는 재미도 생겼고요. 이 운정 시리즈를 시작하게 만든 사진이 한 장 있어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저 광장에 서 있는 사진이었는데, 정확히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느낌이 좋아서 그 사진 한 장에서 이 시리즈가 시작됐어요.

사진들을 나란히 놓고 보니 톤이 일관돼서 좋아요.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안에 인물이 있는 구도도 그렇고요.

육교 위에서 출퇴근길에 찍는 사진들이다 보니 얼굴을 크게 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체로 멀리서 찍게 돼요. 사적으로 촬영하는 셈이라, 그런 조심스러움이 자연스럽게 거리감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사진 수업에서 배운 게, 사진은 꼭 인화해서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요즘은 꾸준히 인화를 하고 있어요.

아까 정을 붙이려고 물건을 들였다는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집과 관계 맺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집과 관계를 맺는 일이 단순히 물건을 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제게는 이불 빨래도 그중 하나예요. 세탁기가 돌아가고, 그걸 볕에 널어 말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이불이 널려 있는 모습, 혼자 소파에 앉아 있는 저녁 시간,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런 것들을 통해 집과 잘 관계 맺는 일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어떤 집이든, 물건을 들이든 식물이나 동물을 들이든 사람을 들이든, 혹은 맛있는 음식을 자주 해 먹거나 커피를 꼭 갈아 마시는 습관을 만들든.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집과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아요.

혼자여도 그렇게 잘 지내는 비결이 관계에 있는 것 같아요. ‘관계를 발명한다’는 표현을 저는 요즘 자주 떠올리는데, 현 님은 그걸 어떻게 하고 계신 거예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여도 당연히 잘 맞을 거라고 믿는 편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끼리는 분명 잘 맞을 거야’ 하는 믿음으로 자리를 마련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모임이 있을 때 서로를 소개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만나 친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어주는 게 아니라, 서로 좋아하게 될 거라는 그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제가 말하는 관계의 발명이에요.

그렇게 발명한 관계들이 결국 삶 곳곳에 있는 거네요.

맞아요. 듀엣 낭독회를 통해 쌓인 우정도 있고, 최근에는 퀴어의 중년과 노년을 함께 준비하는 협동조합에도 가입했어요. 이렇게 여러 갈래로 관계를 만들어두는 일 같아요. 대학 시절부터 이어온 관계처럼 하나에만 깊이 집중하는 방식도 있지만, 저는 여러 경로로 맺어진 관계들을 텃밭처럼 가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당근도 있고, 셀러리도 있는, 그런 다채로운 텃밭이요.

<끝>

김현

Big Issue Korea Vol. 350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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