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2026년 10월 15일

서울역 앞 치킨뱅이에서 번개 약속이 잡혔다. ‘간단하게 맥주 한잔’으로 시작했으나 술자리는 계속 이어져 주종을 넘나드는 밤(새벽)이 깊어 갔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서울역에 도착하자 맥주 생각이 절로 든 모 시인에게 연락이 온 건 저녁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잔업을 하다가 본 그의 메시지에 머릿속은 이미 맥주 생각뿐. 나 또한 참새인걸. 지체 없이 202번 버스를 타고 우리들의 방앗간, 치킨뱅이로 향하는 길에 사무실에서도 연락이 온다. 규환도 오늘따라 술 한잔이 고픈 모양. 어쩌다 보니 넷이서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각자가 책방에서,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머릿속에 맥주 한잔을 떠올리고 있던 이들이 모이게 된 건 어느 평범한 밤이었다.

사건의 전조는 사건 이후에야 보이는 법이다. 사건이 될 줄 몰랐던 평일 밤에 만난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없이 그저 시원한 생맥주를 마셨다. 속도가 빠른 내 잔이 먼저 비면 어쩔 수 없이 한 잔 더, 열변을 토하느라 목 축일 새도 없었던 탓에 누구 하나의 잔이 가득하니 그렇다면 두 잔 더, 그렇게 치킨뱅이 사장님은 끝없는 생맥주 주문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지친 얼굴로 이제 그만, 제발 그만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감이 임박하였으나 “간단하게 한잔만” 하자던 우리들의 마음은 잊힌 지 오래. 초심이란 왜 이리도 쉽게 잃고 마는 것인지. 하나 흥이 오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일 출근인데. 저는 내일 촬영있어요. 난 중요한 미팅이요. 저마다의 사연을 꺼내는 목소리가 애달프다. 누구 하나 먼저 쉽게 2차를 제안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꼴이다. 치킨뱅이 앞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일을 염려하던 3인 뒤로 구세주가 등장한다. 저는 내일 아무것도 없는대용? 포켓몬스터의 마자용 같은 말투와 표정을 한, 그저 해맑은 저 아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그러나 나머지 셋은 그 한마디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눈치챈 마자용은 주도권을 쥔다. 제가 여러분을 책임지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의 하해와 같은 마음 씀에 모두가 “어쩔 수 없이” 2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택시를 타고 종로를 향해서. 

그날 밤엔 정말 어떠한 전조도 없었을까. 여기서 그만해야 했을 타이밍을 애써 모른 척했던 건 아닐까. 우리는 기분 좋은 가을바람을 만끽하며 종로3가 포차 골목을 걸었고 웃음과 해학, 농담과 자조를 뒤섞으며 빈자리를 찾아 소주를 주문하고 말았다. 바람 너무 좋다. 오늘 날씨가 딱이다 딱이야. 술이 술술 들어가네. 그러다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우리가 3차로 정한 곳은 인적 드문 골목에 위치한 어느 살롱이었다. (실은 그곳이 라이브 바나 가라오케 같은 분위기일 줄 알고 들어갔으나 알고 보니 살롱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곳이 어떤 곳이냐가 아닌 우리를 받아주느냐, 술을 마실 수 있느냐, 즐거우냐였으므로 지하의 작은 살롱은 적격이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살롱에 있던 사람들은 경계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마침 낭독이 이어질 거란 말에 흔쾌히 자리를 잡았다. 시인 하나에 출판사 대표 하나, 에디터와 디자이너가 섞인 우리가 낭독을 마다할 리 없었다. 

차분한 분위기에 숨죽여 무대(라고 불러도 될까 싶지만 작아도 무대는 무대)를 응시했다. 짧게 자신을 소개한 K는 아끼는 책을 읽겠다며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어 마지막쯤을 펼친 뒤 내게 건넸다.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시거든요. K는 수록된 시를 읊기 시작했다.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화려한 치장과 어울리지 않게 담백하고 차분한 낭독이었다. 시 한 편을 읽는 내내 나를 빤히 쳐다보던 K를 애써 모른 척하며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빈 데를 배회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다 생각했지만 낭독을 마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쩐지 그게 꼭 그를 대신해 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내게 들어와 잔뜩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사람들이 손뼉 치는 틈을 타 눈가를 훔치고 술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기운이 오른 우리와 새로운 무리의 등장에 신이 난 살롱의 멤버들은 금세 가까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와 건배가 오갔다. 웃음이 끊이질 않던 작고 낡은 살롱에서 정체 모를 술잔이 뒤섞인 게 언제부터였을까. 마치 오래 알고 있던 사이처럼 하나의 무리가 되어 어깨동무를 한 채 주거니 받거니, 지상의 세계를 등지고 우리만의 지하 낙원을 꾸린 것 같은 시간은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흘렀다.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서는 나를 따라온 건 살롱 그룹의 K였다. 낭독 이후 묵묵한 편이었는데,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인지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이었다. 작가라고 했죠? 무슨 글 써요? 그럼 글도 쓰고 출판사도 운영해요? 좋아하는 책은 뭐예요? 해방촌 살기 좋아요? 형식적인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가 이제 그만 들어갈까 싶을 때,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병맥주 두 병이 간이 의자 옆에 놓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눈빛을 한 건 그와 나 모두였을 것이다. 물 흐르듯 한 병씩을 차지하고는 짠 한 번에 한 모금. 이어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뿌연 연기로 차오르는 골목길은 가 본 적 없는, 꿈에서나 본 세상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속엣말이 절로 하나둘 새어 나왔고, 그 역시 묻지 않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뱉었다. 가로등 불빛이 갸름하게 비추는 전봇대 아래서 그의 손길이 내 어깨와 팔에 자주 닿았다. 그러다가 입을 맞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상의 소음을 모두 지운 듯 고요한 세계에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키스하는 게 생경했다. 두 입술 사이로 침 섞이는 과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다른 두 것이었다가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 하나의 색이 만들어지는. K의 입술은 보드라운데 혀는 단단했다. 탱글탱글하달까. 장인이 뽑아낸 우동 가락을 먹는 것 같았다. 한참을 키스한 뒤 마주하는 얼굴은 왜 항상 낯선지. 어색함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입가를 훔치며 그가 물었다.

“근데 저 모르시겠어요?”

응?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우리가 아는 사인가 싶어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낯선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방황하는 내 눈동자를 읽은 것인지 피식 웃고는 아녜요, 하고 마는 그. 태연한 척 담배를 피웠지만 머릿속은 바삐 돌아갔다. 나를 어디서 봤을까. 우리 어디서 봤더라. 원나잇으로 만난 사람 중 하나려나. 그렇다면 그 많은 상대를 일일이 셀 수 없을 테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그렇담 고작 하룻밤으로 나를 기억할 만큼 그에게 내가 강렬했던 걸까. 이어 몇몇이 살롱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살롱 안은 너무나도 안전해 보였다. 그늘을 지운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기쁜 사람들이 모인 것처럼 웃고 떠드는 이를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몰랐는데, 한참을 지나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이 언제 간 건지. 나도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뜬 뒤였다. 그때였다. 어차피 늦은 거 아침 먹고 갈래요? 뒤따라 나온 K였다. 자신의 단골 가게로 향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어쩌면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 것도 같아 보였다. 누군가의 뒷모습은 은밀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감추려 노력해도 감출 수 없는 진실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뒷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더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의 단골집은 우동 가게였다. 따끈한 우동을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K 역시 그런지 뜨거운 면발을 거침없이 흡입했다. 후루룩후루룩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는데 그 소리가 꼭 키스할 때 들리던 소리 같았다.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괜히 달아올라 얼굴을 식히는 나를 흘겨보는 K. 음흉한 미소를 뒤로하고, 다만 우동을 한 그릇씩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범인은 반드시 사건의 장소에 나타난다. 다음 날(하지만 아침에 집에 들러 쪽잠을 잔 뒤 씻고 나왔으니 같은 날인) 책방으로 찾아온 손님이 내가 쓴 책 한 권을 계산대에 올리며 말했다. 

“저 이제는 기억나요?”

분장 뒤에 가려졌던 맨얼굴이 모자 아래로 보였다. 그 순간 살롱에 들어설 때 흘러나오던 음악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이어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몸에 새겨진 것처럼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그 시절, 그날 밤 우리가 주고받은 것들이 몸속 깊은 데서 요동쳤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 옅게 미소 짓는 얼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앉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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