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리 시절

2026년 08월 15일

입추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더위가 꺾인다. 여전히 한낮의 열기는 이길 재간이 없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있다. 그러면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냄새, 온도, 노을의 색감,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바람의 질감 모두 그때와 닮아있다.

여름방학 후 2학기가 시작한 첫날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던 네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수능과 졸업을 앞둔 때라 반 아이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나 역시 너와 잠시 한 반을 나눠 쓰다 졸업앨범의 한 페이지에 나란히 사진을 남긴 채 스치듯 안녕, 하는 사이가 될 줄 알았다. 그런 예감은 보란 듯이 빗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를 둘러싼 소문이 학교를 메웠다. 일 년을 꿇은 뒤, 어딘가에서 돌아온 신원미상의 학생은 가십거리로 제격이니 씹고 뜯고 맛보는 재미에 누구도 내막을 모르는 이야기가 유령처럼 교내에 떠돈 것이다. 하지만 네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수군대는 애들은 금세 줄었다. 시큰둥한 너보다 재미난 건 얼마든지 많으니 아이들은 발 빠르게 뜨거운 감자를 찾아 떠났다. 그때 나는 네 눈빛을 보았다. 모두가 뒤돌아 홀로 남았을 때, 허공을 향해있던 너의 무심한 표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것. 처음 보는 것. 그리고 매혹적인 것. 찰나에 어린 너의 내면을 보았기 때문인지 내 눈엔 네가 그저 조용한 학생으로만 보이지 않았고, 너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며칠이나 지난 뒤였을까. 어느 밤에 교직원 휴게실에서 우리는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 복도를 지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불빛에 우연히 들어선 것이었는데, 후로의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매일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너만의 세계에 나를 들여 우리 둘의 공간이 된 후미진 휴게실. 너는 교직원 휴게실 특유의 낡고 허름함이 마음에 든다고, 묘한 긴장감과 안락함이 공존하는 곳이라며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로 시간을 죽였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오래 묵은 먼지와 변색한 집기로 가득한 작은 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초록색 전구가 켜져 있던 이상한 방. 그래. 하양도 노랑도 아닌 초록의 빛이 일렁이던, 교직원은 한 번도 오지 않던 교직원 휴게실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 무슨 얘길 나눴을까. 너는 쓸데없는 소릴 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까. 다만 너의 교복에서 나던 냄새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마도 네 방, 너의 집에서도 풍길 것이 분명한 생활의 냄새를 숨죽여 들이쉬곤 했으니까.

매점에서 커피포리를 사다 주던 너 역시 기억한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히 묵묵하게 행하던 습관. 너는 왜 안 먹냐고 물어도 대답 대신 빨대를 꽂아 우유를 건네던 너. 줄어드는 우유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너의 얼굴을 나는 애써 모른 체했다.

내게 처음으로 술을 알려준 것도 너였다. 수능을 마치고 새해가 밝아오길 기다리던 추운 밤. 자정이 되자마자 편의점으로 들어갈 때 기세등등해하는 나를 보던 네 얼굴. 술을 마실 마땅한 곳이 없어 비어 있는 상가와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된 골조 건물 사이를 몇 시간 돌아다닌 기억. 추위에 이미 붉어진 볼이 취기에 더욱 붉어지는 것을 보며 미소 짓던 너. 그런 네 표정이 짓궂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때 너도 얼마나 긴장했던 걸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늘 낡고 허름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그러나 그곳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지. 이제는 궁금하다. 우리가 그 시절에 몰랐던 것이 아름다움일지 낡음일지. 하긴 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우리가 어디에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꿈의 궁전이라 부를 만한, 그런 델 편하게 여긴 건 너와 내가 그런 존재라는 감각을 체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숨어들 수밖에 없던 우리.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음에도 직감한 우리들의 괴물성. 우리가 정말 괴물이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알지를 못해서 나는 그저 그 시절의 너를 그려보고만 있다.

급식실 옆자리를 비워두고 나를 기다리던 네가 하굣길마다 내게 어깨동무한 채 걷고, 같이 야자를 째자고 꼬드긴 뒤 시내에서 커플 아이템을 맞춘 일을. 빵집 티슈에 적은 편지를 친구들 몰래 주머니에 찔러넣은 것도.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횡단한 사건도. 한밤중 공원 산책(몇 시간 동안 걸었던 길을 걷고 또 걸었던)과 붉어진 내 뺨을 빤히 보던 그 표정까지. 일종의 고백이었던 것이지. 용기가 부족한 너와 수줍던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땐 불가능했던 것이지. 세상이 그랬던 것이지. 우리가 그랬던 것이지.

  • 보조개 찌르기

우리는 버려져 너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초록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밤의 시간들을 안전하다 여겼다. 가을이 깊어 가는 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은 채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까무룩 잠이 들 정도로 고요해서 추운 것도 잊을 수 있었는데.

네 허벅지에 누워 스르르 눈이 감기며 잠이 들 때 느꼈던 선명한 감각. 볼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 하나. 잠결이라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여러 번 반복되니 알 수 있었다. 너는 내 보조개를 찔러보고 있었다. 나도 그게 싫지 않아서 언젠가부터는 입을 오물거리며 보조개를 만들어주었고, 너는 팬 자국을 따라 손끝으로 톡톡 나를 찔렀다. “찌른 건 뺨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었지.” 네가 나를 찌르고 나도 너를 찔렀지. 우리는 분명 서로를 찌르는 사이였던 것이지.

  • 일종의 고백

오늘부터 1일. 요즘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눈치껏, 너도 느끼고 나도 느끼면 자연스레 1일인 셈. 내가 어릴 때도 이런 식의 연애가 가능했다면 그 친구와 나는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다. 바버의 손놀림에 손쓸 겨를도 없이 경계를 허물고 만 규환도 나 같은 놈. 왜 우리는 늘 당하는 쪽일까. 답답한 마음에 여름밤을 핑계 삼아 맥주를 한 잔, 또 한 잔,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마시다 보면 얼큰하게 취해서 하는 말 이래 봤자 그게 우리 아니겠냐는 뻔한 소리. 자조 섞인 농담을 뒤로하고 이제 그만 일어나자, 안녕, 내일 봐. 규환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 들른다. 진열대에 놓인 커피포리 하나에 나는 또 그 애를 생각한다. 우리는 키나 체격이 비슷했고 나이는 고작 한 살 차이였음에도 그 애에겐 어딘가 어른 같은 면모가 있었다. 나는 미성년, 그 애는 성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걔가 건네는 우유를 얌전히 받아먹고, 보조개를 찌르는 손길에 몸을 맡겼던 건지도 모르지. 단지 내겐 함께 다니는 무리가 없어서 유일한 친구인 걔랑 밥을 먹고, 하교하고, 시내와 골목을 전전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연두에서 짙은 초록으로 부풀던 기력이 쇠하여 초록을 잃어가는 계절에 와서야 그때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게 삶이던가. 가라오케의 낡은 소파를 매만지면서 그 시절의 야자 시간을 떠올려보는 나는 아름다운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내가 우스워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너와 나를 위로해 보는 종로의 어느 밤. 가을엔 편지를 하겠다는 노랫말에 기대어 그 애에게 편지를 써보았다. 입추의 신비로움. 가을이 온다. 가열하던 여름을 지나 이파리를 간지럽히는 추풍에 크게 흔들리는 가로수. 그 아래 추락한 낙엽처럼 쉽게 흔들리고 날리고 부서지던 내게, 아직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거란 실낱같은 희망이 되어준 그 애가 보고 싶다. 이리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방패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도 창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네 덕에 밝은 빛을 알게 되었다고, 초록이 저물어도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계절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해주고 싶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그때 그 아이. 그렇게 한때 내게 머물다 간 사람이 된 그는 내 품에서 안도했을까. 우리의 시간이 휴게로 여겨졌을까. 버려진 곳이었던 건지도 모를 휴게실에서 보낸 밤이 어땠는지, 쉼을 찾아 떠난 네가 이제는 잘 지내는지 소리쳐 물어보고 싶다.

낡은 소파 옆 은은하게 우리를 비추던 초록색 조명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을 그려본다. 초록빛이 스러져가는 오늘에서야 우리가 함께한 그 짧고도 강렬한 나날에 미도리 시절(みどりじせつ)이라 이름 붙이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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