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것들

2026년 06월 02일

공유 오피스를 쓰다보면 늘 유쾌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유’라는 말 안에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구두 계약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색감의 컵 같은 집기나 1960년대 네덜란드산 빈티지 2인 가죽 소파는 공유하지만, 공유될 수 없는 것들도 역시 분명하다.

그렇게 가끔 일하다 보면 민망한 일이 생긴다. 어느 날, 종길이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하던 찰나, 마침 그날 점심으로 먹은 서하네 김밥(정확히는 소금에 적절히 절여진 당근과 오이가 듬뿍 들어 있는 내 최애 야채김밥)이 한창 내 위 속에서 소화되는 중이었다. 그전까지 사무실에 혼자 있던 나는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원하게 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이어 도어락의 전자음이 들렸다.

  • ‘삐삐삐삑—’

종길이 사무실에 들어와 처음 한 말은 이랬다.

  • “음~ 냄새 좋다.”

보통 이런 즉각적인 반응을 꺼내는 사람이 아닌데, 왜 들어오자마자 그런 말을 하나 싶었다. 속으로는 사실을 말해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집에서는 한번도 내보지 않은 용기(방밍아웃)를 내보기로 했다.

“종길, 근데 나 뭐 하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 “나 사실 방금 방귀 뀌었어. 미안…!”

공유 오피스에선 나의 향기로운 방귀 냄새처럼 선을 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 말인즉슨,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유 오피스의 매력은 섹슈얼리티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때로는 모호하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고,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공유 오피스라는 공간은 인간의 유연성과 자유, 자발적인 노동의 형태를 전제한다. 혼자서도 생산적일 수 있는,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개인, 그리고 언제든 교체 가능한 자리를 포함한 것들. 공간 자체가 이미 어떤 종류의 선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이 오피스를 처음 만들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복잡한 종류의 우연과 행운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은 결코 충분하지 않고, 특히 퀴어는 주변의 모든 것과 부딪히는 존재이기에 성장하고 살아갈 곳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조지프 오스먼슨의 문장 인용)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퀴어들에겐 섹슈얼리티로 가능한 일들이 있다. 살아온 환경도, 학교도 직장도 다른 게이, 레즈비언, 게이 셋이 모여 ‘GLG’라고 처음 이름 붙인 이 공간은, 성수, 이태원, 홍제에 각각 흩어져 살던 삼각형에서 가장 중심을 잡아줄 곳이었다. 그때도 결혼이라는 제도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오래된 연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고, 가정 비슷한 것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만들어가는 자연적 동료였다.

이 공간이 용산 삼각지(마치 세 사람을 상징하는 삼각형처럼)에 자리한 것도, 정치 권력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유난히 가시적인 위치에 자리 잡은 것도 모두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다. 나는 에디터였고, 그들은 영상 감독이고, PD였으며, 그때만 해도 모두 회사에서 갓 나와 프리랜서로서 자리를 잡기 전이었다(그런데 2년 사이 놀랍게도 각자의 자리를 훌륭히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둘은 2년이 지나 새가 둥지를 떠나듯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고, 그 뒤로 이 사무실은 내가 오롯이 인수하게 된것이다.

그렇게 현재의 ‘우정 오피스’라는 공간이 된 이 곳의 운명은… (일단 납작하게 말해서) 자본주의적 공간과는 분명 다른 방식의 규범이 생겨나는 곳. 사회의 경계선과는 다른 새로운 선들이 생기고, 이로 인해 어떤 이들에게는 활동 영역이 열리기도, 어떤 이들에게는 열리지 않기도 됐다. 예를 들어 건축적으로 거의 동일한 우리 옆 공간에서도 누군가는 우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일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어느 공간이든 결국 그곳에 있는 사람에 따라 정의된다. 특히 공유 오피스라는 곳은 늘 유동적인 곳이니까. 여러 방향으로 기울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한 공간에 모이는 곳. 물론, 종길과 나는 항상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통유리에서 가장 먼 구석, 창이 보이는 그 자리. 처음에 나는 종길이 구석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말해준 이유는 조금 달랐다.

“여기 앉으면 풍경이 잘 보여.”

그곳에서 보이는 건 어떤 풍경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건너편 건물의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 종길은 그게 좋다고 했다. 무언가를 쓸 때, 투명한 것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자기 안에서 열리는 것들이 있다고. 메모장에 적어야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그저 들었다. 중요한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들으면 자꾸 놓친다.

  • “나도 그래. 네가 뭔가 하고 있으면 나도 하게 돼.”

이곳에 머물며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의 모니터가 아니라 몸(자세)을 감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방식과 시간이 완전히 다르고, 거창한 공동의 목표도 없다. 이 글쓰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우리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어떤 곳에 두느냐는 몸이 어디로 향하는 가를 결정한다. 어떤 몸들은 특정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편안해지고, 어떤 몸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끊임없이 조금씩 어긋난다. 그 어긋남은 잘못이 아니라 세상과는 분명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긋남’을 느끼는 것은 꽤나 퀴어적(일단 납작하지만)이고, 이 ‘우정 오피스’만의 매력이다.

어쨌든 이 오피스에선 그 선들이 누군가에겐 투명하게 보인다. 모호하고, 애매하고, 자유로운. 그러나 절대 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것(!)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 애인처럼 다정하지도, 직장 동료처럼 잠재적 경쟁 관계도, 친구처럼 사적이지도 않은 이 관계. 당장은 뭐라고 정확히 이름 부를 수 없는, 공유 오피스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형태는 기존의 감각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함께 있지만 함께 일하지 않는. 아는 사이지만 깊이 알지는 않는.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면서도 그 고독이 완전히 고립되지 않도록 옆에 있어주는.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지 않고 각자의 선(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는)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까지나 같은 공간 안에 있다. 내 향기로운 방귀처럼 어긋남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어쩌면 이 관계의 본질일지 모른다.

사진: 김찬영

<끝>

P.S

프라이드 먼스를 맞아 사무실에 처음으로 무지개 플래그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시원하게 열린 창이 있는 곳인데, 왜 이제야 그 생각을 했을까 싶다가도,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하는 건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사실 무지개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인테리어적으로), 모쪼록 올해 유월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자긍심 넘치게 살아보려 합니다.

모두 행복한 프라이드 먼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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