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오케 가자!

2026년 09월 01일

나는 노래방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내 인생에서 노래방이 가르쳐준 것들을 좋아했다. 열일곱, 학교와 집과 학원 사이 어딘가에 낀 채로 살던 시절, 노래방은 그 삼각형의 동선 바깥에 있는 서라운드 예체능 공간이었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어요!’라며 매정하게, 처음 보는 낯선 숫자가 모니터에 뜨긴 하지만, 그 채점이 내 인생에 영향을 주지 않는 곳. 핑클을 불러도 되고 엔싱크를 불러도 되는, 음정이 올라가지 않거나 내려가지 않아도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되는, 폐활량도 덤으로 늘게 해준, 그 시절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노래방은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지금처럼 ‘코노’가 일상화되기 전엔 반드시 같이 갈 친구가 있어야 했는데, 누구와 가느냐, 누가 먼저 마이크를 잡느냐, 누가 예약 버튼을 몇 번이나 누르느냐, 누가 탬버린을 치는 역할을 자처하느냐. 그 작은 방 안에도 나름의 위계와 눈치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에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스무 명쯤 모여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 이성과 동성 선후배들 사이에서 노래방에 가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열일곱의 나는 용케도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불렀다. 그 당시 내 MP3 플레이어 안에는 이효리의 「Get’ Ya!」나 아무로 나미에의 「CAN YOU CELEBRATE?」가 재생되고 있었지만, 노래방에서는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노래를 예약하기 전 치밀한 계산을 했다. 그 곡이 혹시 너무 멋있어 보이려는 티가 나지는 않을까, 아니면 ‘객관적으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곡일까 하는 계산. SG워너비의 소몰이 발라드 풍은 굳이 나까지 부를 필요가 없었고, 버즈는 이미 혈기 넘치는 남자애들이 예약을 다 해놓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의 음악은 자존심이 상해서 부를 수 없었다. 관객이 있는 나름 내 데뷔 무대였기 때문이다. 고음에 약하고 비교적 저음이 감미로운 내게 어울리는 음악은 김동률 선배님의 노래가 딱이었다. 너무 절절해서도 안 되고, 하이라이트(가 없어서)에서 삑사리 날 위험도 적으며, 가사에 술과 섹스 이야기 없이도 적당히 어른스러운 감성이 마음에 들었다. 노래를 마치니 “오빠, 너무 멋있어요…”라는 말이 내 귀에 들렸다. ‘휴…’ 속으로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매하게 끼를 떨다가 다음날 전교에 소문이 나는 것보다는 나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나니 그새 노래방은 다른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 뒤풀이의 마지막 코스에선 늘 나는 소녀시대나 투애니원을 부르며 재롱을 떠는 광대가 됐고, 내가 흥을 돋우는 것만큼, 누군가의 노래를 귀담아듣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까지가 노래방의 질서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다음엔 취직 후 회식의 연장선, 노래방이 노동이 된 시기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탬버린을 손에 쥐었다. 말그대로 춤추는 탬버린이 된 것이다. 사회생활의 영역이 된 노래방엔 팁을 주고 받는 사람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이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가라오케는 달랐다. 소년소녀의 순수함의 향수를 간직한, 고향같다. 마음 울적한 날에 종로3가역을 지나 창덕궁 방향으로 가는 큰길에서 한 골목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건물들. 어두운 밤, 야릇한 조명과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익숙한 노래 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이 골목에 울리면, 취기에 홀린 듯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한다. 가라오케는 노래방과 다르다. 내게 가라오케는 지난 노래방의 역사를 다 합쳐놓은 곳이다. 계단을 내려가거나 스테이지가 보이는 복도를 지나는 그 짧은 시간, 조명은 점점 밝아지고,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노래는 세레나데가 된다. 오늘은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설레는 기대를 안고 들어서면, 회전하는 미러볼, 낡은 초록색 레자 소파, 벽에 붙은 정체 모를 빛바랜 포스터가 반긴다. 중간에 무대가 있고 그 주위로 테이블과 바가 둘러싸고 있는 이곳엔, 회식 자리의 노래방처럼 위계를 따라 도는 마이크는 없다. 대신 길고 끝이 뭉툭한 그 물건을 한 개 두고 마치 오늘밤 새로운 나만의 마이크를 찾고 싶은 사람들의 쟁탈전이 벌어진다. “누가 우선 예약하셨어요?”라며 때로는 싸움도 벌어진다. 그 물건의 운명은 오늘 밤 수많은 남자의 입술을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렇게 고민할 새도 없이 벌써 열 곡이 예약된다.

나는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마치 그 사람의 일기를 읽고 싶은 기분이랄까. 어떤 노래를 고를까. 그날은 갑자기 종길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 그를 데리고 가라오케에 갔다. 종길이 백지영의 「사랑안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병맥주와 과일안주가 채 나오기도 전에 노래를 예약하고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모니터의 가사를 곱씹으며, 마치 MBC <나는 가수다>에 백지영이 출연해 ‘무시로’를 부를 때, 그녀를 바라보던 중년 남자들처럼, 어딘가 복잡한 상념에 잠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리모컨에는 손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이크가 몇 번이나 그의 앞으로 넘어갔지만, 그는 매번 웃으며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왜 노래 안 불러?” 내가 물었다.

“부르고 있잖아, 마음속으로.”

“내 귀엔 안 들려.”

“나는 듣는 게 더 좋아.” 종길이 말했다.

마치 음악시간 수행평가 시간에 절대 노래 부르지 않는 일진들처럼,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앞이 아니고서야 노래 부르지 않을 비밀스런 야쿠자처럼, ‘설마, 귀엽게 음치인가?’, ‘아니면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망한 트라우마가 있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수줍게 사양하는 얼굴이 괜히 웃기면서도, 조금은 멋있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소파에 기대 남의 노래를 들으면서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이고, 가끔 후렴만 조용히 입모양을 따라 하고, 한 곡 한 곡 가사와 멜로디를 음미하며 즐기고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이크를 손에 잡지 않고 가라오케의 정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여러 가수의 조합 중에 가장 좋은 건, 남자 듀엣이다. 김동률 이전에 전람회가 있었고, 이적 이전에 패닉이 있었듯, 유희열 이전엔 토이가 있었듯, 감수성이 뛰어나지만 남을 프로듀스하기 좋아하는 수줍은 남자들이 TV 앞에 서고 빛이 나는 솔로로 성공하기가 힘드니까. 사실 그들은 디바가 될 운명인데, 이 가요계 시스템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늘 옆에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겠지, 하면서. 그리고 한 명은 지독한 게이이고, 디나이얼일 거라는, 서로의 재능을 탐하는 그런 근거 없는 상상을 하곤 했다는 점도 지금 생각하면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나는 플라이 투 더 스카이와 브라운 아이즈를 유독 좋아했다. 하얀색 민소매를 입은채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활어처럼 춤추는 두 남자의 「Sea of Love」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인가. 정확히는, 브라이언과 환희, 나얼과 윤건의 화음을 들을 때, 그 너머의 관계를 읽었다. 저 두 사람 사이엔 어떤 감정이 있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것일까, 매 순간 입맞춤을 하며, 한 사람의 저음이 다른 사람의 고음을 받쳐주는 균형, 그러면서도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관계를 상상했다. 마치 자기보다 여린 보컬과 듀엣을 자처하던 학창시절 일진 남자애들처럼, 어쩌면 종길과 나 사이에도, 그런 모종의 튜닝감이 있기를 바랐다. 각자의 파트가 있고, 한 사람이 비는 자리를 다른 사람이 알아서 채워주며 조율해나가는 방식.

그리고 그 언젠가, 종길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도 상상한다. 마치 이 교환일기처럼,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처럼, 여남소노 누구나 좋아할 보편적인 러브송의 전주가 흐르고, 나얼과 윤건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목소리가 아름답게 겹쳐지는 순간을. 그는 아마 윤건의 저음을, 나는 아마 무리해서 나얼의 고음을 맡을 것이고, 추억처럼 함께하고 또 다시 솔로가 될 것이고.

<끝>

  • P.S.

9/5(토) 저녁 7시 오피스에서 작은 파티(DJ Daroq)를 엽니다. 누구든 놀러올 수 있으니, 이 글을 본 독자님들도 와주시면 기쁠 거 같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 따라 삼각지 간다”

좋은 음악을 듣다 보면
좋은 친구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FRIEND IS MY REAL BOYAK!

🗓️ 9월 5일 토요일, 19:00-
🏷 EVERYBODY WELCOME with FREE ENTRANCE
📍우정오피스(서울 용산구 백범로 402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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